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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08. 2020


'죽고 싶은' 우울, '살고 싶은' 우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우울이 있다. ‘죽고 싶은’ 우울과 ‘살고 싶은’ 우울. 둘은 상태는 같지만 방향은 다르다. 



'죽고 싶은' 우울


 아주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었다. 그것은 ‘죽고 싶은’ 우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세상과 부딪칠 용기는 없으니 도망갈 방법이 ‘죽음’밖에 없어 보였다. 다 끝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마치 그림을 그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케치북을 찢어버리는 아이처럼. 


 하지만 죽을 용기는 없었다. 당연했다. 진짜로 죽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삶을 외면하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운 좋게도, 아니 어쩌면 운 나쁘게도 나는 의지할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이든, 정서적이든 의지할 구석이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을 테다. 애완동물은 무기력할 수 있지만, 야생동물은 무기력해지는 순간 생존할 수 없으니 말이다. 


 믿을 구석이 있었다. 내가 무기력하게 누워 있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경제적으로 살 만하신 부모님이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정서적으로도 비빌 언덕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우울해도 나의 ‘착한’ 남편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 두 비빌 언덕을 믿고 한껏 더 우울에 빠졌다. 



 의지할 구석이 있는 우울. 그 우울에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기쁨’을 쫒는 존재다. 기쁨을 쫒는 인간이 오랜 시간동안 우울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그 우울 안에도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나의 상처를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으면 우울하지만 참 편한 법이다. 내 인생이 우울해진 이유를 모조리 세상 탓으로 돌려 버리면 난 아무 책임 없는 무고한 희생자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무고한 희생자는 계속 무기력해도 괜찮다는 마음의 면죄부를 얻는다. 아니,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계속 무기력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자라는 증거를 집착하듯 수집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더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우울증이었을 때 난 행복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 내가 제일 듣기 싫었던 말 중 하나가 ‘우울증에는 운동이 약’이라는 말이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운동하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나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가 싫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운동하라’는 말 속에 사랑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내가 누워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 문제를 해치우듯 나에게 운동을 권했다. 하지만 나도 운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30여년을 살았는데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하기 싫었다. 운동하는 대신 하루종일 누워서 우울한 사람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읽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나는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 우울증은 ‘죽고 싶은’ 우울증이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운동을 하고 싶을 리 없다. 나는 세상의 빛과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저 심연까지 그저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렇게 나만 존재하는 어두컴컴한 곳에 웅크리고 있어야 비로소 세상을 외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이 무서워 잠수해버린 나에게 아무리 수면 위로 올라가는 방법을 알려줘 봤자 들릴 리가 없었다. 내가 진짜 올라가고 싶었다면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 찾았을 것이다. 문제는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는 것. 사실 진짜 나의 욕망은 비빌 언덕들의 보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삶의 문제를 외면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잠수하고 싶은 사람을 물 밖으로 끌어내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로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누군가의 도움 때문은 아니었다. 어느 날, ‘죽고 싶다’가 아니라 ‘이러다가 정말로 죽겠다’는 자각이 들었을 때, 나는 우울증의 침대에서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도망갔다가는 영원히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한 채 죽을 것 같았다. 아마 그때 나는 심연의 바닥을 찍은 것이리라. 진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 뒤, 나는 나를 심연으로 도망치게 만든 그 삶의 문제들을 직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수면을 향해 처음 발차기를 했다. 실력 좋은 스승의 도움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수면 위로 나올 수 있었다. 수면 위의 공기는 참으로 상쾌했다. 이런 게 세상이라면 왜 도망갔나 싶었다. 헤엄치는 것에 자신이 붙은 나는 이제 다시 물에 빠지는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살고 싶은’ 우울


 그런데 우울은 파도와 같은 것이었다. 내가 용을 쓴다고 몰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예전과 결이 다른 우울이 또 찾아 왔다. 당황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 온 우울을 겪으며 나는 예전과는 다른 점을 발견했다. 그 차이 때문에 나는 이번 우울이 그렇게 두렵지가 않다. 


 지난 우울이 ‘죽고 싶은’ 우울이었다면, 이번 우울은 ‘살고 싶은’ 우울이다. 나는 지금 파도에 휩쓸려 물에 잠겼지만, 심연으로 꼴아 박히고 싶은 욕망이 없다. 나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기 위해 지금 부지런히 발차기를 하고 있다. 몸에 활력이 생기면 정신적 활력도 돌아오니, 시간이 나는 대로 운동을 하고 있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하고, 강아지와 함께 뒷동산에 올라 좋은 공기도 마시고, 먹고 싶은 것도 잘 챙겨 먹는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려고 하고, 그들에게 나의 우울을 유쾌한 방식으로 털어놓고 있다. 우울할 때마다 좋아하는 복싱을 하러 간다는 스승의 말이 와 닿는다. 악착같이 수면 위로 올라오려는 나를 보면서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을 해봤다. 


 첫 번째는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부모님도 남편도 변함없이 내 곁에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어졌다. 물론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자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내가 가장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내 철학 스승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누군가를 ‘보호’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지, 못 걷는다고 업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에게 의지한다는 건, 그가 알려주는 헤엄의 방법들을 믿는다는 것이지 그를 쳐다보고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심연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 기쁨 말고 수면 위에 올라가 세상을 만나는 적극적인 기쁨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또 심연에 꼴아 박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기를 잡아먹고 싶진 않다. 예전에 내가 스스로 물 속에 들어갔던 건 난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밖에 모르기에 심연에 처박히며 주변 사람들의 기운을 쭉쭉 빨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나와 상대를 둘다 파괴하는 방식으로 사랑받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좋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우울하면 나와 얽혀있는 이들도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뿌리 식물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니까. 나는 내 우울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그저 폐 끼치고 싶지 않다는 자기 보호적 마음과는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살고 싶어’ 진다. 나는 살고 싶다.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수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산소라도 나눠주고 싶다. 그렇게 다 같이 수면 위로 올라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웃고 떠들고 싶다. 그러니까 우울의 파도에 휩쓸려도 나는 열심히 발차기를 할 것이다. 악착같이 행복해지겠다. 나의 기쁨을 위해, 우리의 기쁨을 위해. 


 오늘 저녁엔 맛있는 걸 해 먹고 자전거를 타러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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