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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04. 2020

어느 날, 글이 안 써지기 시작했다.

슬럼프, 허무주의, 그리고 사랑.

 한 달 전부터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찾아왔다. 어느 날부터 글이 안 써지기 시작했다. 글감이 떠올라 한 문단을 쓰면 다 지워버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 어떻게 글이 맨날 술술 나오겠어.’ 애써 불안감을 잠재우고 다음 날 다시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이번엔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난 1년 간 매일 글을 써온 것이 무색하게 ‘글을 어떻게 쓰는 거였더라?’라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점점 글 쓰는 것이 무서워졌다.  


 집착하면 더 힘들어지니 집착하지 말겠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 믿었다. 평소처럼 집필실에 매일 출근했지만 글을 쓸 수가 없으니 대신 영화만 주구장창 봤다. 집필실을 같이 쓰는 선생님과 동료 오빠는 생계 때문에 바빠 백수인 나 혼자 집필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집필실을 어두컴컴하게 해놓고 평소에 보지 않을 법한 우울한 영화들을 봤다. 그래도 오랜만에 찾아온 우울한 시간을 어른스럽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내심 ‘이렇게 차분하게 기다리다 보면 다시 글이 쓰고 싶어지겠지’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찾은 좋아하는 일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진단 말인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던 올 한해, 그 변화의 불안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글쓰기 뽕’ 때문이었다. 진짜로 그랬다. 난 지난 1년 동안 아침에 눈을 떠서 자기 전까지 하루 종일 글쓰기 생각밖에 안 했다. 아침에 샤워하면서 글감이 떠오르면 집필실에 가는 내내 글 쓸 생각에 정신이 팔려 내리는 역을 자주 놓칠 정도였다. 그런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안고 집필실에 와서 정신없이 글을 쓰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 밤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다가 잠들었다. 나는 글쓰기와 내 자신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내가 쓴 글이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았다. 뭣도 모르는 애송이가 자기 자신이 기특한 걸 주체하지 못해 쓴 글 같았다. 나는 원래 내 잘난 맛에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철학을 하고나서부터 ‘잘남’의 기준이 ‘사회적 명성’에서 ‘인문학적 깊이’로 바뀌었지만, 잘난 척 하고 싶은 마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틈만 나면 아는 척, 잘난 척, 성숙한 척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매일 글을 쓸 수 있었던 동력도 그 ‘나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철학 공동체를 운영하며 사람들의 내밀한 인생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내 나르시시즘에 차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일이 너무도 많이 벌어지고 있었다. 각자가 꺼내놓은 무거운 삶의 진실 앞에서 나는 그다지 특별하지도, 잘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나는 이곳에서 꽤 열심히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송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내 자신에게 흠뻑 취해 있던 마음이 사그라지자 내 글이 구려 보였다. 나르시시즘의 균열과 함께 글쓰기에 미친 듯이 몰입했던 시간도 정지했다.



 허무주의의 초입에서


 몰입이 깨지자 잊고 있던 불안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불안은 얼마나 빨리 삶을 잠식하는지. 갑자기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글 쓰는 걸 좀 좋아한다고 앞으로 글 쓰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니 나도 참 나이브했네.’ 세속적인 현실 감각이 되살아났다. ‘난 이제 여성으로서의 피해의식에서 거의 벗어났는데, 내가 꼭 페미니즘 해야 돼?’ 평소에 관심 있었던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게도 한번 들기 시작한 부정적인 생각은 나를 넘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내 동료들의 삶과 작품이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우리는 사실 그냥 단체로 미친 건 아닐까? 우리는 정말 지금-너머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한 번도 우리가 가는 길에 회의적인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이런 마음의 요동침이 생소했다.


 허무주의는 마음을 얼음장처럼 굳게 만들었다. 나는 우리 공동체에서 ‘주는 사람’에 가깝다. 나는 인생에 방황을 하다가 결국 ‘철학’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다. 그들의 고되었던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들 참 귀엽고 예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공동체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애정을 베풀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애정일지언정 사람들을 사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호감을 표시했는데 상대방은 불쾌하게 받아들인 적도 있고, 나는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내 욕심이었다는 걸 깨달은 적도 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어긋남이 발생해도 툭툭 털고 일어났을 텐데, 한번 허무주의가 시작되자 그간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 주고 오해 받은 일들이 물밀 듯이 떠오르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게 참 고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타인에게 밀도 높은 사랑을 받아 삶이 변해본 경험이 있기에 ‘사랑’ 그 자체에 대한 회의는 들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토록 밀도 높은 사랑을 하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어 기가 죽었고, 그릇을 키워나가는 길이 졸라 힘들 것 같아 지레 겁먹었다.


 회의주의와 함께 외로움이 찾아왔다. 냉소적인 생각이 들자 따뜻했던 마음도 점점 얼어붙었다. 사실은 나도 그냥 사랑 받고 싶었다.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굳이   해도  마음을 찰떡같이 아는 사람과 밀도 높은 대화만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안겨 엉엉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제  자기 인생의 성찰이 시작되어 정신없는 시기고, 스승은  말고도 사랑해주어야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나도 그런 그들에게  하나 외롭다고 징징댈 정도로 미성숙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혼자 외로움을 견뎠다.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주변을 서성대면서.



작은 사랑의 힘


 그러던 어느 날 불현 듯, 이러다가는 정말 외로워질 것 같았다. 나는 우리 공동체 사람들이 보는 네이버 카페에 요즘 내 상황에 대한 글을 썼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잘 써지지 않지만 그래도 썼다.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물씬 묻어나는 글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지금 허무주의에 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소에 비웃던 바로 그 허무주의. 허무주의로 가고 있다는 경보음이 울리자, 최근에 나를 잠식했던 부정적인 생각들에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글이 구린 게 싫었다. 그래서 글 쓰는 게 두려워졌다. 그런데 구리다고 평생 글을 안 쓸 건가? 그것처럼 바보 같은 짓도 없어 보였다. 또 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을 주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그냥 쉽게 사랑 받고 싶었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사랑 받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나만 쉽게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사랑 주는 게 힘들다고, 가만히 있어도 사랑 받는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손가락 빨고 기다릴 건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줄 수밖에 없다. 자기 돈 아끼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 베푸는 순환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먼저 대가 없이 돈을 내야하지 않겠나. 모두 상대가 돈을 내기만을 기다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지치고 힘들어도 계속 사랑을 주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오해가 일어나고, 준만큼 받지 못한다는 결핍이 생겨도 어쩔 수 없다. 그 어긋남들이 두려워 혼자 고립되기를 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까.


 그 글을 쓴 다음 날 집필실에 가는 길, 스승으로부터 글이 한 편 왔다. 나는 지금까지 몰입의 힘으로 불안을 견뎌왔는데 그 몰입이 깨져 불안이 튀어나왔다는 내용이었다. 스승은 불안은 몰입으로 잠재울 수 있지만 몰입이 깨지면 불안은 다시 찾아온다며, 진정으로 불안을 잠재우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고 했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안심이 되는 한편 짜증도 났다. 스승, 아니 철학이나 인문학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늘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체 그놈의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냔 말이다. 사실 내가 지친 이유 중엔 그 사랑 타령도 있었다. 내가 주는 사랑은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였고, 나는 그 작은 사랑을 주면서도 조금씩 외로워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집필실에 와 스승의 얼굴을 보자 그냥 냅다 눈물이 났다. 같이 점심 먹자고 보낸 문자에 일 약속이 있다더니 점심은 못 먹어도 얼굴은 보고 가겠다고 약속을 조금 미뤄준 스승의 작은 사랑에 마음이 풀려버렸다. 결국은 사람들끼리 사랑하고 오해하며 부대끼고 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있다면 그날 하느님은 나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작정한 것일까? 스승의 작은 사랑을 시작으로 작은 사랑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내가 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 걱정이 되었는지 공동체의 몇몇 이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들은 아직 그 지점에 가보지 않아서 내가 느끼는 우울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걱정되어 연락을 했다고 했다. 자기가 모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위해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에게 작은 사랑들을 주었다. 어떤 이는 영화를 추천해주었고, 어떤 이는 시덥잖은 개그를 쳤다. 어떤 이는 우리 아직 그릇도 안 되는데 괜히 큰 사랑하지 말자며 “언니, 작게 라뷰해”라는 깜찍한 문자를 보내줬다. 그 작은 사랑들 앞에서 나는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내 마음을 찰떡처럼 읽어내는 사람만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왜 이러는지 섬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내가 좀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사람들의 진심은 충분히 전해졌다. 내가 사랑받고 싶은 방식으로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쩌면 나는 큰 사랑에 중독되어 작은 사랑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사랑-되기'


 나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보잘 것 없는 글을 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보잘 것 없는 글을 계속 쓰는 것이다. 글쓰기를 사랑한다면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과 스승도 보잘 것 없는 인간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단체로 미친 거라서, 평생 잠재력을 펼치지 못하고 계속 보잘 것 없는 작품만 만들다가 죽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의 공동체 또한 그저 그런, 보잘 것 없는 실험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 오해와 어긋남을 감당하며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세상에 상처받고 인생에 방황하다가 영등포구청까지 밀려온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더 사랑해주어야겠다. 큰 사랑을 못한다고 좌절하는 건 경박스러움이고, 상처받기 싫어 관조만 하는 건 치졸함이다. 나는 지금 내 깜냥껏 이 사람들을 사랑하면 된다. 어쩌면 삶의 의미는, 아니 삶의 재미는 이 작은 사랑을 큰 사랑으로 키워나가는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난 그 ‘사랑-되기’의 거친 물살에 기꺼이 몸을 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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