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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Nov 28. 2019

널 잘못 읽어서 미안해.

 철학을 배우면 안 보이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러는지, 이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마치 평생 난시로 살아오다가 처음 안경을 쓴 것처럼, 온통 뿌옇기만 했던 세상이 갑자기 뚜렷해진다. 그 뚜렷해진 시야는 두 가지의 기쁨을 낳는다. 첫번째는 내가 내 자신과 세상을 더 제대로 보게 되었다는 자기만족. 두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보인다는 우월감.


 그래서였을까? 철학을 배우면서 나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보게 된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명료해진 시야와 그로 말미암은 참된 기쁨을 그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 지난 글들을 보여주고, 편지도 종종 쓰곤 했다. "나도 원래 세상이 뿌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네가 지금 괴로운 건 이러이러해서잖아. 너도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벗어나면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삶이 가능해져. 나랑 함께 하자." 이런 내용의 편지들. 그 당시에 나는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이런 편지들을 썼다. 마치 안대를 찬 채 절벽을 향해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심정이었다.



 내 마음을 받은 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자기는 잘 살고 있는데 왜 그런 얘기를 하냐며 화를 냈다. 그는 자기만 인정하지 않을 뿐 누가 봐도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 하고 있는 이였다. 실제로 그의 삶은 괴로움과 후회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삶을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니 철저하게 외면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나는 그런 것들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 지점에 있어봤으니까. 그래서 넌 지금 그냥 외면하고 있는 거라며 몇 번을 더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오히려 더 큰 반발심만 불러 일으켰다. 그걸 뒤늦게 눈치 채고 나는 그에게 입을 닫았다.


 한편 어떤 친구는 내 편지를 받고 굉장히 고마워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우울하다는 걸 예전부터 자각하고 있는 이였다. 그는 내 말이 다 맞다고 했다. 자신이 우울한 이유, 힘든 이유, 거기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 모두 다. 자기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줘서 고맙다며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그와 글을 주고 받았다. 그는 그간 해주지 않았던 아주 어두운 이야기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함께 울고, 위로하는 시간들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오래가진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그가 위로만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도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지만 그의 진짜 욕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였다. 그의 삶은 불행했지만, 편안한 면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그를 위로하다가 지쳤다. 어떤 위로도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끌어낼 수는 없기에.


 또 다른 친구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나를 너무 좋아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다 들었다. 그가 나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줘서였을까? 아님 내 이야기를 늘 경청해서였을까? 나는 신이 나서 내가 아는 것들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어느 순간 그에게 정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좀 힘들더라도 저 친구를 어떻게 해서든 좀 더 나은 삶으로 데려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를 보면 자꾸만 화가 났다. 나는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가리키고 있는데, 그는 내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 않고,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걸려 나는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이 친구는 그저 자기랑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를 사랑했다면 그깟 시간, 같이 주저 앉아 보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 또한 그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나는 더 이상 그에게 해줄 말이 없어졌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셋 다 나의 욕심과 무지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세 사람에게 해준 말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셋 다 나와 비슷한 이들이니까. 내가 한 말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작은 변화라고 할 지라도, 지금쯤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 경우 모두 백프로 내 잘못이 맞다. 나는 그들의 과거는 읽었을지언정, 그들의 욕망을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절박한 상황에서 철학을 만났다. 내가 믿었던 모든 삶의 방식이 흔들리고,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는 상황. 그랬기에 누구보다 간절한 심정으로 내 인생에 드리워진 마지막 동앗줄을 손에 피가 나도록 꽉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난 그들도 지금과 같은 삶이 지속되면 언젠간 예전의 나처럼 암흑같은 절망에 빠질 거라는 걸 안다. 그게 보였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동앗줄을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동앗줄을 잡는 것은 그 사람 마음이다. 동앗줄을 던지고 난 뒤, 난 그저 그들이 그 줄을 잡고 올라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첫번째 친구는 자기에게 동앗줄을 던졌다는 사실을 불쾌해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 친구에게 계속 넌 동앗줄이 필요한데 왜 외면하냐고 다그쳤다. 그는 내 잔소리가 듣기 싫어 결국 동앗줄을 본체만체하기 이르렀다. 두번째 친구는 동앗줄을 잡는 시늉만 했다. 나는 그가 줄을 잡았으니 이제 올라오겠거니 하며 영차영차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앗줄을 잡은 그의 손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는 나락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이였다. 세번째 친구는 자신을 향해 동앗줄을 던져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가 동앗줄을 던지면 그 사실에 또 기뻐했다. 그렇게 그에겐 늘 여러 동앗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의식 과잉인 나는 세 경우 모두 나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진짜 욕망을 알게 된 건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처음에는 그들이 답답했다가 나중에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답답했던 이유는 그들이 내 동앗줄을 잡지 않거나 잡는 시늉만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부끄러웠던 이유는 그것도 내 욕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게 맞는 길이라 할지라도 동앗줄을 잡을 마음이 없는 이에게 계속 잡으라고 요구하는 건 분명 폭력이다. 나는 그들의 말만 듣고 진짜 욕망은 읽지 못했기에, 본의 아니게 도움을 가장한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앉아 있고 싶은 사람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건 폭력이다. 설령 그의 다리가 괴사로 썩어 가고 있을 지라도 그렇다.


 그렇다면 앉아 있고 싶은 사람은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 앉아 있고 싶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나도 그의 옆에 앉아서 그가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까지 사랑해주는 것이다. 그가 앉아 있건 누워있건 디비 자건 모든 걸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이라면, 그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는 이라면, 앉아 있고 싶은 사람은 앉아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 맞다. 그도 언젠가 다리가 저리고 썩어가는 것이 보이면 일어나고 싶어질 테니까. 그때 다가가서 부축을 해주는 것이 나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길일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폭력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 그것은 사람을 때리고 괴롭히는 직접적인 폭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것도 폭력이다. 그의 말과 행동에 가려져 있는 진짜 욕망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 그것도 폭력이다. 그래서 '무지'하면 안 된다. '무지'는 폭력이다.


 나는 지난 날의 나의 '무지'를 반성한다. 하지만 그들을 잘못 읽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들을 잘못 읽었기에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으니까. 최소한의 폭력, 아니, 어제보다 작은 폭력을 행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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