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글쓰기를 위해
요즘 산부인과를 다니다가 문득, 배란과 글쓰기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매달 내 난소에서는 수십 개의 난자가 자란다. 하지만 그들 중 충분히 성숙한 한 개의 난자만이 난소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 난소를 빠져나온 난자는 나팔관을 타고 자궁으로 이동해 정자와의 만남을 기다린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자를 만나지 못하고, 허물어지는 자궁내벽에 휩쓸려 소멸한다. 또, 희박한 확률로 정자와 만났다고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케미’가 맞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궁까지의 긴 여정을 버텨낸 정자들 중 한 마리가 난자의 겉껍질을 힘껏 뚫고 들어가야만 비로소 둘 사이의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화학적 결합만이, 난자도 정자도 아닌 새로운 존재, 즉 ‘수정란’을 만들어 낸다. 유有와 유有가 마주쳐 새로운 유有가 생성되는 것이다.
생리불순과 과배란 주사
자연스러운 글쓰기는 자연스러운 배란과 닮았다. 난자가 충분히 성숙하면 자연스레 난소를 떠나듯, 글감도 충분히 성숙하면 자연스레 글이 된다. 난소에서 한꺼번에 여러 개의 난자가 자라듯 내 머릿속에도 항상 여러 개의 글감들이 자라고 있지만, 그 중 ‘지금 나와야 하는’ 글은 단 한 개다. 내가 할 일은 그것이 충분히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글로 옮기는 것뿐이다. 첫 문장만 쓰면 마법처럼 완성되는 글,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글은 이처럼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 없이 탄생한다.
하지만 난자를 생산하고 배출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에도 어긋남이 발생할 수 있다. 예전에 한 번 스트레스로 인해 한 동안 생리를 하지 않은 적이 있다. 배란도 되었고 생리혈도 가득 찼는데 호르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예정일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생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배출되어야 할 것이 배출되지 못했을 때의 답답함, 그 아랫배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을 가끔 글을 쓰며 느낄 때가 있다.
무의식 저편에 꽁꽁 숨겨두었던 내 진짜 모습, 진짜 욕망을 마주하는 글. 써야하지만 쓸 용기가 안 나는 글. 머릿속에서는 지금이 이 글을 써야할 때라는 신호가 울리지만, 썼다가는 쓰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글이 있다. 하지만 매달 배출되는 난자가 한 개이듯 한 시점에 써야할 글도 늘 한 개라서, 그 글을 쓰지 않으면 다른 글도 쓸 수 없게 된다.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순환이 멈춰버리는 것이다. 지금 써야할 글을 쓰지 않는 대가는 꽤나 무겁다. 머릿속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해지고, 점점 삶은 무겁고 무기력해진다.
반면에 아직 익지 않은 글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도 문제다. 산부인과의 난임 치료 중 과배란 주사라는 것이 있다. 과배란 주사는 보통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시술 전에 맞는 주사로, 평소에는 한 개씩 배출되는 성숙 난자의 개수를 호르몬 조절을 통해 여러 개로 늘리는 주사다. 과배란 주사를 맞으면 한 달에 여러 개의 난자가 성숙되기 때문에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시술의 성공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과배란 주사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낫는다. 억지로 난자를 성숙시키기 때문에 호르몬 불균형을 낳을 수 있고, 난소에 무리가 가서 헐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 과배란 주사를 오랫동안 맞으면 배란이 잘 되지 않는 배란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
과배란 주사를 맞는 것은 조급함 때문이다. 빨리 임신을 하고 싶기 때문에 서둘러 여러 개의 난자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글쓰기에도 조급함이 끼면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나는 한 동안 머릿속에 떠다니는 글감들을 모두 글로 옮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늦게 시작한 글쓰기인 만큼, 부지런히 써야한다는 괜한 조급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글을 두세 개 쓰지 못하면 충분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지만 어떤 달은 내가 브런치에 글을 몇 개 썼는지 세어보고 평균적으로 며칠에 한 번씩 글을 썼는지 계산해본 적도 있다. 나는 원래 글을 잘 쓰던 사람이 아니니까 ‘다작’으로 실력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철학을 공부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마주침이 끊이질 않았기에 글감은 계속 생각났다. 나는 떠오르는 글감을 쉴 새 없이 글로 써 내렸다. 마치 빨리 쓰지 않으면 그 글감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물론 익지 않은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 첫 문장만 쓰면 줄줄 달려 나오는 글과 달리, 그런 글은 한 문단, 한 문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는 글쓰기마저 ‘임무’처럼 생각해, 한번 시작을 하면 무조건 끝맺음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힌다고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 좋자고 하는 일에 뭘 그리 비장했는지. 써지지 않는 글도 억지로 고민해가면서 썼다. 물론 그렇게 나온 글이 좋을 리가 없었다. 턱턱 막혀가며 쓴 글은 읽을 때도 턱턱 막힌다.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글들이 한 편씩 나올 때마다 내 정신적 난소는 조금씩 헐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모르겠다’는 배란 장애가 시작된 것이다.
써야할 글을 쓰지 않으면 생리 불순이 오고, 아직 쓸 때가 안 된 글을 억지로 쓰면 과배란 부작용이 온다. 나는 아직도 자연스럽게 글을 생산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여전히 써야할 글을 쓰지 않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가 되지 않은 글을 너무 빨리 꺼내 억지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글쓰기와 배란을 연결지어 보며, ‘자연스럽게 생산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은 생겼다. 그래서 써야할 글을 회피한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써보려고 한다. 그걸 계속 회피하다가는 더 큰 답답함에 빠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는 스승의 도움을 받는다. 마치 생리를 터트리는 호르몬 주사를 맞듯, 스승이 시기적절하게 준 주제들에 대해 글을 쓰다보면 어느 새 막혀있던 어떤 부분이 풀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글을 과배란하지 않으려고도 노력한다. 물론 나는 아직도 어떤 글이 지금 나와야 하는 글인지 잘 구분하지 못한다. 가끔 이 글을 써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다가 쓰는 도중에 막힐 때도 많다. 하지만 이제는 글이 막힐 때 억지로 밀고 나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그냥 접는다. 그리고 다시 그 글이 쓰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충분히 성숙된 글은 저절로 배란될 것이라 믿으며.
배란, 수정, 임신
자연은 자연스럽게 자연물을 생산한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열매가 맺는다. 난자와 글이라고 해서 자연 법칙에서 벗어날 리는 없다. 때가 되면 난자가 나오고 때가 되면 글이 나온다. 나는 자연이 자연스럽게 자연물을 생산하는 과정을 믿는다.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싶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쓴 글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독자들과 만나고 싶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내 글을 찾아준 독자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는 몇억 분의 일의 확률로 내 글을 읽어 준 사람이다. 물론 내 글을 읽었다고 해서 무조건 ‘케미’를 느끼는 것은 아닐 테다. 나 또한 살면서 수없이 많은 글을 읽었지만, 그 중 내 마음에 작은 일렁임이라도 일으킨 글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몇 개 되지 않는 글은 분명 나에게 ‘화학 작용’을 일으켰다. 어떤 글은 꿈을 심어줬고, 어떤 글은 미처 알지 못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글은 일생일대의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 주었고, 어떤 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세상에 대한 의심을 품게 했다. 진짜 좋은 글은 독자와 ‘화학적 결합’을 일으킨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수정란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되듯, 좋은 글은 독자와 결합해 그를 이전과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얼마나 신비로운 행위인지. 글과 독자 사이에는 끊임없는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좋은 글은 독자와 결합하여 독자를 이전과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반대로 좋은 독자가 좋은 글과 결합하면 그만의 해석을 통해 원래 글에서 새로운 지평을 끌어내기도 한다. 그 주고받는 화학적 결합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잉태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글쓰기로 임신한다는 것은.
배란하고 수정하고 임신하고 싶다. 두려움과 조급함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내가 생산한 것으로 타자를 만나 새로운 것을 생성하고 싶다. 나는 그렇게 생산하는 자연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