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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13. 2021

특별하고 싶어서 (1)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구성요소들이잖아. 구조의 소립자들이지."

 내가 들뢰즈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2019년 2월경이었다. 첫 번째 수업은 들뢰즈가 그의 제자 끌레르 파르네와 진행한 인터뷰 영상 「질 들뢰즈 A to Z(L’abecedaire de Gilles Deleuze)」 수업이었다. 그 뒤로 매주 목요일마다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 「스피노자의 철학」, 「천 개의 고원」에 대한 원문 수업을 듣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처음 만났던 「질 들뢰즈 A to Z」 수업에 가장 애착이 간다. 그의 사유를 처음 접해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항상 글로만 접해왔던 철학자를 생생하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게 큰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들뢰즈의 저서를 읽을 때 가끔씩 보랏빛 스웨터를 입고 백발을 한 들뢰즈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제자 파르네를 부드럽게 돌려 까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질 들뢰즈 A to Z」에서 들뢰즈는 제자 파르네가 ‘A’의 동물(Animal)에서 ‘Z’의 지그재그(Zigzag)까지 알파벳의 각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주제로 던지는 질문에 그의 생각을 말한다. 사실 처음에는 들뢰즈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말하는 ‘내용’도 생소한데, 그 말을 하는 ‘방식’까지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상식에 거스르는 내용들을 논리나 설명 대신 굉장히 함축적이고 이미지적인 언어를 통해 전달한다. 마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말을 처음 들으면, 그 말의 정확한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사유를 처음 접하면 대부분은 멘붕에 빠진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들뢰즈의 사유 또한 계속 만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들뢰즈를 이해하는 나만의 희미한 윤곽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 희미한 윤곽이 들뢰즈의 사유가 내 삶에 들어와 화학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나만의 단독적인 지식’일 테다.

「질 들뢰즈 A to Z」의 한 장면

 

 들뢰즈의 말과 글이 매력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들뢰즈의 말과 글은 한 문장, 한 문장 밀도가 높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이 많다. 그래서 가끔은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들뢰즈는 설명충이 아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있지만, 그것을 논리에 따라 단계적으로 빽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그럴 수 없어서 그런 것일 테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니까.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치려 한다고 생각해보자. ‘상대에게 성적으로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라는 백과사전의 정의를 알려준들, 사랑의 그 모호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럴 때는 오히려 어떤 작가가 ‘사랑’에 대해 쓴 소설이나 어떤 화가가 ‘사랑’의 감정에 대해 그린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사랑’의 많은 부분을 전달할 수 있다. 모호하기에, 더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의 말과 글에는 여백이 많기에, 읽는 이의 삶의 맥락이 들어갈 자리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들뢰즈의 수업을 들으면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도 사람들마다 기억하는 부분이 다 다르다. 나는 기억도 안 나는 문장이 어떤 이에게는 일주일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문장이 되고, 들뢰즈가 흘리듯이 했던 말이 나에게는 삶을 되짚어보게 할 만큼 의미 있는 문장이 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인 책을 읽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다. 많은 경우, 저자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배워가야 할 지식을 미리 정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은 모두 비슷한 내용을 습득하게 된다. 같은 책을 읽으면 모두 비슷한 독후감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글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마다 꽂히는 문장이 다르다. 마치 들뢰즈가 뷔페를 차려놓고, 독자들에게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알아서 찾아 먹으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 고기가 땡기는 사람은 고기를 먹고, 야채가 부족했던 사람은 야채를 먹는다. 그렇게 섭취된 고기와 야채는 각자의 몸에 들어와 영양분을 제공하고 궁극적으로는 몸의 일부가 되어 몸의 성질을 조금씩 바꾼다. 들뢰즈를 공부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그때 내 상황에 따라 유독 땡기는 문장들이 있었다. 아마 그 당시 내가 고민하거나 갈구하던 부분과 닿아있는 내용들이었을 테다. 그런 문장들은 가슴에 들어와 궁극적으로 내 삶을 조금씩 바꾸었다. 들뢰즈는 삶을 변화시키는 철학자다.

질 들뢰즈와 제자 끌레르 파르네




 들뢰즈 첫 수업인 「질 들뢰즈 A to Z」에는 유독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많았다. 영상이라서 들뢰즈의 말이 숨소리, 목소리, 분위기 등과 어우러져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그렇기도 하고, 아무래도 ‘말’이라서 ‘글’보다는 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제자 파르네에게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동화책 읽어주듯 조곤조곤 이야기해준 많은 철학적 사유 중에 유독 나에게만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던 부분이 있다.


파르네 : "당신은 유명하지만 숨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시는 편이잖아요."

들뢰즈 : "난 내가 유명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네. 은밀히 다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예 인지되지 않는 것이야. (...) 지각되지 않는 것은 정말 멋질 거야. 이것은 개인적이 문제지. 사람들이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이 나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 것이라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사람들을 보게 되지. 왜냐하면 나는 그래야 하니까.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다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네. 결국 나는 어떠한 소수의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네. 하지만 내가 그들을 만날 때, 그것이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길 바란다네. 인지되지 않는 사람들과 인지되지 않는 관계를 가지는 것. 그게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지.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구성요소들이잖아. 구조의 소립자들이지."
「질 들뢰즈 A to Z」, Resistance(저항)


 이 부분을 가르치며 스승은 “자신이 우주의 소립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권력 의지가 의미 없음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우주의 소립자’, ‘권력 의지’라는 단어에 꽂혔다. 그리고 서양 철학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들뢰즈가 자신이 인지되지 않길 바란다고 하는 것도, 인지되지 않는 사람들과 인지되지 않는 관계를 갖고 싶다고 하는 것도, 자신이 아주 작은 구성요소라고 하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들뢰즈는 당대의 유명한 다른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방송 출연을 하지 않고, 적극적인 정치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학파를 만들지도 않았다. 박사 논문인 「차이와 반복」을 내자마자 일약 스타가 되지만, 평생을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가르치고 책을 쓰며 조용히 삶을 보냈다. 나는 그런 들뢰즈의 삶이 이질적이면서도 굉장히 멋있게 느껴졌다. 나라면 박사 논문으로 스타 대접을 받는 순간부터 내 자신에 흠뻑 취해 각종 관종 짓은 다 하고 다녔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들뢰즈가 자신을 ‘아주 작은 구성요소’라고 일컫는 부분에서, 천하의 들뢰즈도 자기를 ‘소립자’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나, 부끄러워졌다. 무엇보다 스승의 말이 걸렸다. 나는 권력 의지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너도, 인간도, 동물도, 그저 '우주의 알갱이'라는 것을 알면 권력 의지는 절대로 생길 수 없다. 권력 의지는 ‘나는 너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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