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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2. 2021

'구분짓기'라는 신기루 (2)

"부르주아들은 그런 두려움을 세습하는 것 같다네."

「들뢰즈 A to Z」에서 파르네가 들뢰즈의 유년시절에 대해 묻는 부분이 있다. 들뢰즈는 꽤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자랐다고 했다. 들뢰즈가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유독 나 혼자 깔깔 소리를 내며 웃은 부분이 있었다. 들뢰즈가 청소년기에 ‘도빌’이라는 곳에서 일 년을 공부했는데, 그때 프랑스에 처음으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유급 휴가가 생겼다고 했다. 유급 휴가를 받은 노동자들이 휴가를 즐기러 도빌 해변에 놀러 온 상황을 들뢰즈가 이렇게 표현한다.


들뢰즈: 도빌 해변에 유급 휴가를 받은 사람들이 물결 같이 밀려오던 것이 기억나네. 도빌 해변이란 원래 오랫동안 부르주아들이 찾아오는 해변이었어. 부르주아들의 장소였다네. 그런데 유급 휴가를 받게 된 사람들이 처음으로 오게 된 거지. 아주 대단했어. (...) 나의 어머니는 아주 고상한 사람이었는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해변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니까. 그러니까 부르주아들에게 있어서 계급의 차이를 잊는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야.

파르네: 그들이 가졌던 두려움에 대해 더 이야기해 주세요.

들뢰즈: 부르주아의 두려움은 절대 끝날 수 없는 것이었지. 그것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영토에 관한 문제였다네. 서민 계층이 갑자기 몰려와 도빌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게 되었다니. 부르주아들에게 그것은 공룡이나 독일군이 몰려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을 거야. 독일군이 탱크를 몰고 도빌 해변에 진격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을 거라고. (...) 내 생각에 부르주아들은 그런 두려움을 세습하는 것 같다네.


 들뢰즈의 말을 듣고, 정말 부르주아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뢰즈의 어머니에게서 우리 엄마의 모습이 보여서 큭큭 웃음마저 터져 나왔다. 엄마는 내가 동네를 돌아다닐 때 옷을 잘 차려입지 않는 것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혹시라도 내가 그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까봐서다. 엄마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나고 자란 ‘강남구 대치동’이라는 동네에는 정말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와 행동을 하고 있으면 은근하지만 분명한 혐오의 시선이 쏟아졌다. 마치 남루한 행색을 하고 백화점 명품관에 들어갔을 때처럼 말이다.


 도빌 해변에 노동자가 들어온 상황도 비슷했으리라. 그 시선은 ‘너는 이 영토에 어울리지 않으니 들어오지 마!’라는 의미다. 그래서 들뢰즈가 부르주아들에게 도빌 해변의 상황은 독일군의 ‘침입’에 버금간다고 한 것이다. 들뢰즈가 그것이 부르주아와 그들의 영토문제라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부르주아는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영토를 규정한 뒤, 그 영토를 사수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 영토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들과 비슷한 존재들 뿐, 자신들과 다른 존재가 들어오는 것은 ‘침입’으로 간주한다. 자신들과 다른 존재가 섞여버리는 순간, 그 영토는 더 이상 그들의 영토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토와 그 밖의 구분. 그것이 부르주아들의 영토 문제다.

 



 내가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했던 ‘구별짓기’도 부르주아의 영토 문제에 맞닿아 있다. 나의 사고방식은 내가 나고 자란 환경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더 작은 원 안에 들어가야만 칭찬과 인정을 받아 소외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건,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영토 안에 남아 있어야만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과 동일하다. 그것은 사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운동장에 원을 그리고 아이들에게 원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부추기던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그 원들의 중심에 있다. 권력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원을 그린 뒤, 중심에 가까운 원에 들어올수록 칭찬과 인정을, 중심에서 먼 원으로 밀려날수록 소외와 불행을 얻을 거라 겁박한다. 사람들을 그 말을 믿고 더 작은 원에 들어가려 애를 쓰는 동시에 자기가 현재 있는 원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 전전긍긍한다.


 그런 권력의 속삭임에 가장 크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바로 부르주아다. ‘더 작은 원으로 들어가라’는 권력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자들만이 부르주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은 영토에 대한 집착이 매우 크다. 그들에게 영토 밖으로 밀려나는 공포는 거의 불지옥에 떨어지는 공포에 비견한다. 나는 부자 동네에 살며 그런 장면을 많이 목격했다. 우리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다른 동네로 이사가야 하는 상황을 견디질 못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경기도로 이사를 가야 했을 때, 한동안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물리적인 영토가 아닌, 사회적인 영토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들 좋은 대학에 다니면서 그 안에서 또 고시에 붙지 못한 친구들은 ‘고시’라는 영토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위축감 때문에 동창회에도 잘 나오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스타트업을 말아 먹고, 앞으로 글 쓰고 철학하며 백수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뒤에도, 한동안 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위축되기 일쑤였다. 영토 안의 그들이 영토 밖의 나를 조롱할까봐 겁이 나서다. 연예인들이 유명세에서 멀어지면  먹고 살만한 경제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견디지 못하는 이유도, 모범생이 성적을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도, 정년퇴직 후 가장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유도, 모두 자기가 속했던 영토에서 밀려났다는 불안과 상실감에 기인한다.


 나는 그 공포를 잘 알고 있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부르주아는 그 공포를 세습하기 때문이다. “너는 곱게 자라서 험하게 못 산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 줄 아니?" 아버지가 종종 하던 말이다. 우리 부모만 그랬을까. “너 공부 안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 부모도 아이한테 영토 밖의 공포를 주입한다. “너 회사 를 떠나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사장도 사원들에게 영토 밖의 공포를 주입한다. 그렇게 권력이 주입한 수많은 공포들이 내면에 각인되어, 결국 우리는 모든 인생을 영토를 사수하는데 쏟아 붓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도 지금 딛고 있는 이 물리적, 사회적 영토에서 밀려나는 것이 당연히 두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원에서 더 작은 원으로 들어가고 들어간 끝에 발견한 것은 행복은 커녕 더 큰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작은 원으로 들어가도 근원적인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작디 작은 원 안에서 또 치과의사와 영토를 구분지으려고 애를 쓰던 그 의사 친구의 삶이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행복은 작은 원 안에 없다. 행복은 원 밖에 있다. 세상은, 역동적으로 살아숨쉬는 진짜 세상은 원 밖에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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