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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향 Apr 08. 2021

식물, 그들도 꽃길만 걷지 않는다

100일 스토리 생각 없이 써보기


지난해 코로나로 인하여 답답했던 창살 없던 감옥생활에 활력을 주었던 건 다름 아닌 화단의 야생화들이었다. 나름의 작은 소일거리와 즐거움을 주었던 야생화는 유난히 길었던 장마로 인하여 많은 아이들이 흙으로 돌아갔다. 가을이 오면서 남아있던 야생화들이 피워 올린 꽃으로 풍성함을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길게 이어지던 겨울을 만났다. 치쳐만 가던 마음의 황폐함으로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던 시간,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 준 작은 선물이 있었다. 추운 겨울 날씨를 별일 아니라는 듯 빨갛게 피워 올리던 장수매였다. 탐스러운 그 작은 꽃은 이제 곧 봄이 올 거라는 희망과 새로운 힘을 낼 수 있는 좋은 촉매가 되었다.


3월을 맞이하며 창고 속에서 움츠려 있던 아이들이 주인의 눈을 피해 살며시 꽃을 피워냈다. 풍성한 꽃으로 봄을 알리고, 찬바람 맞선 아이들의 선명한 색상으로 마음에 무지개를 피워주고, 선명하게 환한 미소를 안겨주었다.


미소가 아름다운 아이들, 따로 물감을 준비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리 고운 색을 낼 수 있는지 다시 봐도 신기한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꽃은 사람을 참 기분 좋게 만드는 마음의 치료제인 것 같다. 그러니 마음이 우울할 때면 꽃을 한 다발 사 가지고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은종 꽃, 봄의 기운으로 새롭게 꽃 피울 준비를 한다.

가을이 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색을 잃고 조용히 겨울을 보낸 후 이른 봄 뾰족한 촉수를 내밀 듯 올라오더니 어느새 저만치 자라나 옹기종기 모여든다. 처음 은종 꽃을 심을 때에는 몇 뿌리 심지 않았다. 그럼에도 잘 자라나더니 어느새 은종 꽃 군락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모습이다. 줄기는 가을에 메말라 죽고, 씨가 떨어져 나오는 것 같지 않은데 옆으로 자라나는 뿌리들 사이로 새로운 순을 만든다. 매년 생명을 이어가며 확장해가는 저 아이들의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튤립 알뿌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작년 튤립이 한창 피어난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서 화단에 있는 튤립 줄기를 모두 잘라냈다. 잘라낸 빈자리에 다른 아이들을 심기 위해 알뿌리는 모두 캐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알뿌리들이 있었는지 봄이 되자 스스로 저렇게 잘 자라 꽃을 피워 올린다. 빨갛게 피어나는 튤립은 몇 개 없었는데 말이다.


그 뒤로 아직 시간이 필요한 튤립이 연둣빛 물든 꽃송이를 빼꼼히 내보이고 있다. 오래지 않아 저 아이들도 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물론, 저 아이들도 부족한 주인의 눈에 띄지 못해 저 자리에서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외면받은 설움을 보란 듯 뽐내며 밀고 오는 봄바람을 몸으로 밀어내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사실 이 꽃은 우리 집에서도 오랜 시간을 머물며 살아있는 아이다. 명자나무과의 나무인데 이름에 대한 정확한 기억이 없다. 화분에 분재로 키우고 있던 아이다. 5년 이상 꽃을 못 피워 무성한 잎만 바라보다 세력도 약해지는 것 같아 화단으로 옮겨 심었던 아이다. 여전히 잎만 무성할 줄 알았던 이 아이가 어느 순간 꽃을 피워 올린다.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꽃과 작지 않은 크기의 화려함을 무장한 채 말이다.


그 뒤로 다시 이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 봄 꽃을 피워 밝게 맞이해 주지만 한때는 홀대를 받던 아이다. 사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주눅이 들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무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에게 사랑받지 못해 꽃 피우지 못했던 아이가 사람의 관심보다 더 좋은 땅의 힘을 빌어 저리도 고운 꽃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이 말이 과연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인가. 뭐든 생명 있는 사물들은 모두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까만 밤 하얗게 내려온 별들이 차마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채 머물고 있는 듯 한 착각을 하게 되는 아이도 있다. 뾰족한 꽃잎에 향기를 머금고 오늘도 아침 일직 세상이 환하도록 빛을 머금는다.


지난해 작은 씨앗으로 다가와 몇 송이 꽃을 피우고는 숨죽여 시간을 견뎌왔던 것 같다. 아기 손 귀엽게 펼쳐 놓은 듯 앙증맞은 모양으로 초록의 세월을 보내던 아이가 어느새 이만큼 자라나 더욱 풍성해진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초록의 잎도 새하얀 꽃잎도 모두 모양이 비슷해 보이는 생각보다는 까탈스러울지 모르는 맵시를 가지고 봄의 전령으로 온기를 전한다.


화단을 구분하는 방부목의 무뚝뚝함이 재미없다는 생각에 작은 바구니 하나 달아보았다. 지나는 길이라 사람들 발걸음이 때로는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을 삭막한 자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주어진 곳에서 자신을 맵시 있게 꾸며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을 한다.


작은 포트의 비좁은 공간, 숨 막히는 답답함은 찬바람 이겨내기 위한 서로의 체온으로 바꾸었다. 그 나눔의 온기는 힘이 되고 화려한 탄생이 된다.


작은 꽃 한 송이 피어나는 공간으로 꿀벌의 날갯짓 소리 들려온다. 저들은 어디서 꽃이 피는지 어찌 저리도 잘 아는지, 한치의 망설임 조차 없이 바람을 밀고 내려와 꽃송이 포근함에 다리를 풀어놓는다.


꿀벌의 노랗게 익은 무거운 짐 한가득 매달아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어찌 보면 우리들 삶이 아닐까?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 가벼운 마음으로 하늘을 맴도는 꿀벌의 쉴 새 없는 날갯짓으로 바쁜 하루를 시작해 본다.

꽃은 피었으되 힘이 빠진 아이다. 너무 이른 봄, 갑작스러운 따스함에 선잠 깬 모습으로 꽃을 피워 올렸나 보다. 다시 불어오는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떨었다. 떨다 지쳐 늘어진 잎새로 위로랍시고 다독이는 햇살의 따가움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세상은 그런가 보다. 누군가의 도움이 때로는 약이 되지만, 때로는 독이 되어 힘겨운 삶에 더해지는 고통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네 삶도 그렇듯이...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저 아이의 꿋꿋함이, 내려가는 어깨에 힘을 더해주는 참 좋은 미소로 보인다.


작년에 썼던 내 브런치 북 '인생이 들꽃을 닮았다.'의 제목과 같이 봄을 시작하는 이 시간 또다시 우리들 삶과 저들의 삶이 겹쳐져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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