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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향 Apr 23. 2021

밤, 잠,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사색

사람들은 밤을 잃어버렸다.

어둠이 물밀듯이 내려와 세상을 삼키면 모두들 자기 방어하듯 각자의 처소에 불을 밝힌다. 어둠은 쉴 수 있는 배려를 사람들에게 했지만, 사람들은 전기를 만들어 불을 밝히고 밤을 낮과 같이 사용한다. 어둠이 빛에 밀려난 것이다. 어둠이 밀려난 자리에 찾아든 빛으로 사람들은 빛을 즐겼다. 아니, 사람들은 낮보다도 더 환하게 불 밝힌 밤에 익숙해져 스스로를 학대했다.  빛공해와 백색소음으로 이미 우리들의 밤은 평안을 잃어가고 있다. 밤이 낮보다 밝아짐으로 인해 사람들은 쉴 시간에 쉬지 못하고 깨어있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시간을 벌었지만, 쉬어야 할 시간을 잃었다. 피곤은 늘어가고 면역력은 감퇴되어 새로운 질병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 어둠은 밝은 빛을 얻었지만, 사람들은 밤을 잃었다.

이미지 :Pixabay

나도 이제는 밤이 그립다.

잃어버린 어둠으로 잠 못 드는 밤을 살아가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일상이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일상으로 길들여져 새벽 한 두시는 되어야 잠을 청한다. 잠을 청한다고 바로 잠에 들지도 못한다. 잠이라야 고작 5시간 전후,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기분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렇다고 더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를 않는다. 좀 더 깊은 잠을 자볼까 하는 마음에 창문은 암막커튼으로 빛을 가리고 눈에는 안대를 해 본다. 그래도 별반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빛공해에 익숙해져 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잃어버리고 나니 다시 밤이 그리워진다.


잠을 잃어버렸다.

내 삶을 돌아보면 잠을 길게 잔 적은 손꼽을 정도로 많지 않았지만 깊은 잠은 잤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도 잠이 들면 아침 6시 30분에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깊은 잠으로 인해 그만큼 피곤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짧고 굵게 잠을 잤었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는 잠을 잃었나 보다. 새벽 두 시가 되어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갑자기 깨어 시간을 확인하니 3시 10분이다. 뒤척이다 보니 잠들었고, 다시 눈 뜨니 5시 20분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3번의 쪽잠으로 나눠서 잔다. 일어나서도 개운하지 못하고 뭔가 정신이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다. 밤을 잃어버려 피곤이 내 어깨에 목마를 타고 점점 비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이미지 :Pixabay

그래도 적응하며 또 살아간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시간이 되면, 가족들 모여 저녁식사를 한다. 환한 전등 아래 차려진 식탁은 고된 하루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귀한 시간이 된다.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와 모여든 어둠을 밀어낸다. 숨죽였던 식물들은 아마도 우리를 공해 유발자라 탓할 것이다. 쉬어야 할 시간에 인간의 욕심으로 식물들 조차 쉬지 못할 테니 말이다. 인간의 귀에 들리는 음성이 없으니 가볍게 무시하고 환하게 불 밝힌 채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즐긴다. 식물들도 인간의 욕심을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도 변화에 적응하며 살듯이 식물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하며 또 살아갈 것이다.


밤이 깊어간다.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야 한다는 피하고 싶은 현실이 다가온다. 어차피 누워도 잠들 것 같지 않은 현실이 아쉽지만, 오늘만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내일을 대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녁에 마시던 커피도 중단했다. 한동안 쉬었던 운동으로 피곤을 펌프질 해 본다. 흠뻑 흘린 땀을 개운하게 씻고 나면 잠이 잘 오겠지 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본다. 오늘은 조금 더 일찍 밤을 불러본다. 가득 차오른 어둠이 깊은 잠을 안겨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시곗바늘의 초침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어둠 속에서도 눈 속에는 세상이 담긴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은 컴컴한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눈 속에 영상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있다. 잠들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들이 불면의 시간을 붙잡고 있다. 오늘도 여전히 잃어버린 잠을 찾을 수 없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옆지기의 곤한 듯 깊은 숨소리만  귓가에 맴돌고 있다. 내일은 또 어떤 방법으로 잠을 청해볼까 고민해 본다.

이미지 :Pixabay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각자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택해 살아간다. 나름대로의 패턴에 이름을 붙이고, 그럴듯한 사연을 더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저녁형 인간, 아침형 인간, 올빼미족 등은 삶의 방식이 묻어나는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전기가 없을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전기의 힘을 빌어 이렇게 삶의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가끔 밤낮을 바꿔 생활하는 사람들의 건강은 일반인 들과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밤에 잠을 자든, 일을 하든, 즐기는 삶을 살아가든 모두가 그들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걱정이 되기도 한다. 몇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이 불과 백 년도 안되어 뒤바뀐다면 아마도 그만큼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지금의 나도 많지 않은 수면시간이 갑작스러운 패턴의 변화로 인해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밤은 온전히 어둠에 맡겨야 한다. 밤은 온전히 수면에 양보해야 한다. 그런 삶이 좀 더 우리들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자연이 원하는 삶의 방식은 아닐까? 그런 질문을 한 번 던져본다. 그러나 나도 나에게 주어진 밤을 좀 더 어둠에 맡기고, 온전히 수면에 양보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 밤, 나는 오롯이 밤에 내 수면을 맡겨 봐야겠다. 혹시라도 내 수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바람을 한껏 품고서 말이다.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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