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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향 Apr 16. 2021

어쩌면 아픔은 당연하다

어쩌면 아픔은 당연하다

갑자기 세상이 흔들렸다. 미끄러지는 모래들이 내 세포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프다는 생각보다 창피함이 몰려왔다. 잠시 엎드린 채 잠시 그대로 있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새 벌떡 일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 듯 다시 공을 드리블하며 운동을 했다. 창피함을 잊을 만할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무릎에 고통이 찾아왔다. 허리를 숙여 바지를 걷어보니 모래에 쓸린 피부가 살아있는 생명을 자랑하듯 빨간 피를 환하게 내보여준다. 


상처 난 피부의 아픔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 난 곳에 흐르는 빨갛게 익은 피도 잃어버린 납품처를 상실한 채 허무함에 쏟아내는 눈물이 아닐까? 작은 상처 하나에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가 맞물려 작용하고 있다.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 아픔도 모르는 척 그렇게 세상을 살고 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아픔과 상처는 오히려 독이 되어 나에게 해를 가할 것만 같은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sohyang

함께 근무하는 동료가 암에 걸렸다. 대수롭지 않은 기침이 반복되는 모습에 병원 진료를 권유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닌 듯 그렇게 시작된 진료가 암으로 판정이 되고, 병가를 내고 치료를 받다가 결국 퇴직을 했다. 아마도 그 직원은 앞이 캄캄했을지도 모른다. 병과 싸워야 하는 고통만으로도 너무나 힘든 상황일 텐데 퇴직으로 소득마저 사라지는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잠깐 여유가 있다며 사무실에 들렀다. 얼굴은 밝게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모습이다. 야위어진 얼굴과 풍채가 힘들었을 그간의 고통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잘 지냈어요? 별일 없지요?"

"이렇게 다니시는 걸 보니 다 낫으셨나 보네요?"

"이만큼 힘들었는데 다 낳아야지요. 혹시 내 자리 아직 남아 있나요?"

"아유~!! 다 낫았으면 빨리 출근하세요. 자리 뺏기기 일보 직전입니다. 하하하"


반갑게 맞으며 대화를 나누지만 마음 한 구석은 어딘가 모르게 짠하게 아픔이 밀려온다. 평소에 그리도 살갑게 대해주던 동료가 하루아침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반가운 얼굴을 보여주고 돌아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소식이 전해졌다. 다른 곳에 전이가 되어 다시 항암을 해야 한다는 참으로 고약한 소식이다. 그리고 얼마 후 요양병원으로 간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사무실을 찾았던 동료는 아마도 아픔을 숨긴 채 보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얼굴을 봤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병이지만 그래도 건재함으로 포장한 채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직도 그날 사무실 문을 열고 환하게 웃음으로 두 손 흔들며 반갑게 들어오던 그날 동료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Pixabay

스스로 선택하여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어쩌다 보니 태어나있었고, 어쩌다 보니 지금껏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평탄한 꽃길만 한가롭게 거닐 수 있는 인생은 아니다. 환하게 웃는 날이 있는가 하면,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멈출 수 없는 눈물만 흘리는 경우도 생긴다. 힘겨운 역경과 수많은 고비가 순간순간 찾아오는 게 우리들 인생이다. 모두가 살아가는 연습도 없이 처음 살아보는 인생들이다 보니 지름길을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이 최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걸어간다. 그러다 돌아보면 때로는 가까운 거리를 멀리 돌아오기도 하고, 고속도로 옆길을 고속도로라 착각하고 달리기도 한다. 그게 우리들 인생이다.


누군가가 가장 필요한 순간 곁에 남아있는 것은 언제나 자신뿐이다. 남들은 결코 내가 될 수 없으니 결국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람도 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되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갯속 인생에 넘어지고 깨지는 일들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런 삶을 감내하는 우리들의 아픔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Pixabay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뿌듯함 보다 피부의 따가움만 남았다.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는 말이 실감나는 아픔이다. 흐르는 땀에 배어있는 소금이 상처에 스며들었나 보다. 그 자리를 축축한 바지가 꾹꾹 눌러주니 아픔은 더해만 간다. 그래도 웃으며 걸어 본다. 


어쩌면 아픔은 당연하다. 이미 경험한 인생이 아니니 알 수도 없는 앞길에 이만하길 다행이다 생각해 본다. 아파도 당당하게 한 걸음씩 옮겨본다. 5분여 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할 때쯤 아픔은 어느새 익숙함이 됐다. 참을만한 고통이 된 것이다. 우리들 인생도 아쉽고, 아프고, 쓰린 순간은 때가 되면 익숙해지고, 그러다 잊혀져가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온기를 찾아 헤매는 바람이 내 이마에 입김을 불어 본다. 흐르던 땀이 놀라 숨어버린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마당에는 환하게 밝혀진 파티등이 옹기종기 모여 반상회를 열고 있다. 오늘도 이만하면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는 후문이다. 깊어가는 밤, 어둠이 수면을 재촉하면 포근한 이블을 턱밑까지 당여 잠을 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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