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향 Jun 14. 2021

정치인, 개인정보 요구해도 될까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5월 어느 날


어둠이 내리는 마당에 쭈그려 앉아 잡초들과 눈싸움을 벌였다. 안 보이면 지겠다 싶은 마음에 서둘러 2.5촉 전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작은 전등 하나에 들어온 불빛은 어둠에 먹혀 힘을 잃는다. 작은 빛들이 묵직한 어둠을 멀찍이 밀어내는 힘은 역시 집단행동이다. 마당에 사열한 2.5촉의 꼬마전구 20개에 불이 켜지고 나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기분이 든다. 


아까부터 밀당하던 잡초 앞에 다시 앉았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깔끔하게 승리하며 미소를 짓는 순간이다. 그때, 대문이 빼꼼히 열리며 쑥들이 미는 얼굴 하나가 보인다. 기척도 없이 들이미는 얼굴에 나도 몰래 놀라 눈이 커진다.

"누구세요?"

"아~! 여기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잠깐 들어왔어요."

"그러세요?"

"여기 등... 식물들 때문에 켜놓은 건가요?"


가끔 지나가던 이웃들이 만개한 장미를 보고 이끌려 들어오곤 했지만, 꽃을 보러 온 것 같지도 않은데 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불을 왜 켜놓느냐는 듯 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내뱉는다. 그 순간 기분이 상했다. 건성으로 "네."하고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고는 관심도 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앉아 다시 잡초와 힘겨루기를 했다.


"여기 어르신은 안 계신가요?"

"안 계셔요. 왜 그러시는데요?"

나도 몰래 짜증 섞인 말도가 튀어나왔다. 그제야 주머니를 뒤적이며 지갑을 꺼내 명함을 건넨다. 

"아~, 저는 여기 **동 시의원 000입니다."

"네~. 그런데 왜..."


평범한 옷차림에 동네 아저씨인 줄 알았더니 정치인이다. 순간 속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권력은 시민에게서 나온다며 온갖 편의를 다 봐줄 것처럼 떠들고 다니고, 자신이 시민들의 권익에 앞장서는 것처럼 행동하고 다니고 있지만, 실상은 자기들 이권에 급급해 시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인들을 너무도 자주 본 탓일 것이다. (정치인들을 폄하할 생각은 아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이 그랬다는 것일 뿐이다.)


"제가 이 동네 주민들을 위해 도시가스 공급을 좀 더 일찍 하도록 노력하고, 각 가정마다 시공비가 적정한지도 볼 겸 해서 다니고 있어요."

"저희는 이미 계약 다 했고요. 시공사와 얘기도 끝난 상태입니다."

"그래요? 일반적으로 150 정도에 계약하면 적정할 겁니다."

"제가 업체들 다 확인하고, 이미 설치한 사람들에게 확인도 했는데 올해는 그 가격은 없다던데요?"

"그래요? 아유~ 싸게 잘하셨네요."


그 순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무리 정치인이라지만 단가도 모르고 툭 던져놓고서 확인된 데이터가 나오니 바로 말을 바꿔버린다. 차라리 말이나 하지 않았으면 밉지나 않을 것을 아는 척하고 나서 틀리니 말 돌리는 모습은 정말 아니다 싶었다. 그러는 사이 또다시 질문이 날아들었다.


"전화번호 좀 가르쳐줄래요?"

"전화번호는 가르쳐드리기 좀 그런데요."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혹시 민원이라든지 연락이 오면 누군지 모르니까 이렇게 미리 기록해 두면 알 수 있잖아요."

"그래도 연락처는 안 가르쳐드리고 싶은데요."

"들어오면서 보니 주소가. 00길 00. 맞지요?"

"그렇기는 한데 저는 알려드릴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직장은 어디 다니세요?"

"000 회사 00 지점에서 일해요."

"아~! 000 회사 000이 우리 학교 선배님이신데. 잘 계시죠?"

"아~, 네. 잘 지내시죠 뭐."


집요하게 개인정보를 캐묻다 못해 학연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본점에 근무하는 상급자의 이름을 거론하며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기를 은근히 강요하는 그 모습에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런 식이니 정치인이 쓰레기 소리를 듣는 거다.' 

"어차피 사무실도 찾아가도 명함 정도는 받는데, 명함 있으면 하나 주세요."

"명함이..."

명함조차 주기 싫어 뜸 들이고 있는 사이, 소란스러운 밖이 궁금했는지 옆지기가 나오면서 누구냐는 듯 눈짓을 한다. 

"우리 지역 시의원이시래."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불이 환해서 들어와 봤습니다."

"네~."

옆지기는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보내라는 듯 신호를 보낸다. 나도 더는 말 섞기가 귀찮아 가지고 있던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아 든 시의원은 그 자리에서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한다. 그리고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하는 치밀함도 보인다. 

"저, 이제 여기 정리를 좀 해야 되는데 다른 볼일 없으시면 일 좀 할게요."

"아, 예. 볼일 보세요."

그렇게 돌아가려는 찰나 집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시는 과외선생님과 마주쳤다. 시의원은 또다시 선생님과 인사를 하며 개인정보를 캐내려는 행동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시의원 사이에 끼어들었다.

"의원님, 이분은 다른 지역에 사시는 분이라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아, 그래도 인사도 하고.."

"선생님, 다음 타임도 있으신데 신경 쓰지 마시고 가셔도 됩니다."

그렇게 선생님을 보내고 나니 시의원도 더는 있기 그런지 다음에 또 보자며 대문을 나갔다. 시의원이 대문 밖으로 발이 나가기 무섭게 대문을 '쾅'소리 나도록 세게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문을 이중으로 잠가버렸다. 


내가 집에 있는 동안에 대문을 잠그지 않는 이유는 꽃을 찾아 들어오는 이웃들과 사심 없는 교류가 좋았고,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그 순수한 모습이 좋아서였는데 오늘 시의원의 등장으로 내 기분은 망쳤다. 대문을 열면 이런저런 사람들이 기웃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개인의 욕심을 위해 기웃거리는 정치인이 들어올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었다. 


물론 시의원이 내 정보를 모으는 목적이 선한 목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목적이라면 굳이 싫다는 개인 의사에 반해 인맥까지 거들먹거리며 알려고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시의원이 돌아가고 난 후 빨리 내보내고 싶은 마음에 괜히 명함을 줬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물론 전화번호야 바꾸면 그만이지만 말이다. 그날의 일로 대문을 열어놓기가 꺼려졌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웃들과 소통하려는 마음을 한 마리 미꾸라지가 훼방을 놓았다. 


주말, 한낮의 더위가 찾아들면 조용히 아이스커피 한 잔을 내려 우리 집 홈카페로 숨어든다. 낯선 사람들이 기웃거리던 대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이제는 사전에 약속된 사람들만 조용히 스며들어 여유를 만끽한다. 어쩌면 더 편하기도 한 지금의 상황이 좋기도 하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과의 대면으로 설레던 마음이 사라진 점은 아쉽기도 하다. 


밤 9시, 어둠던 화단에 다시 2.5촉의 불이 들어온다. 숨죽였던 6월의 꽃들이 생글거리며 맞이하는 모습이 신선하다. 한낮에 열기마저 식어가고, 숨죽였던 바람마저 꼬리 치는 시간이다. 이런 순간이면 다시 대문을 빼꼼히 열어볼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사진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여왕, 그 화려한 추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