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향 Dec 03. 2021

당신의 냉장고는 안녕하십니까?

냉장고 사망사건

11월이 저물 던 날이다. 마감으로 시달렸기에 일찍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에 도착했다. 환복을 하고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나오는 바람이 미지근하다. 냉장고를 꺼놨나 싶어 다시 보니 불은 들어왔다. 이상하다 싶어 냉동실을 열려고 문 앞에 서니 찰랑하는 느낌과 더불어 양말이 흥건하게 젖었다.

이미지 :Pixabay

"뭐야!! 여기 왜 물이 있어?"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걸레를 찾아 닦고 냉동실 문을 열었다. 냉장고는 이미 홍수 직전이었다. 얼려놓았던 얼음들은 이미 70% 정도는 물이 되어 있었고, 냉동 음식들도 해동이 꽤나 진행된 상태였다.

"혹시 오늘 냉장고 안 열어봤어?"

내 목소리에 놀라 달려온 옆지기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부터 바빠서 나도 좀 전에 들어왔는데... 냉장고가 왜 이러지!!"

옆지기도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다. 냉동실에 녹아있는 얼음이며 음식을 꺼냈다. 생각보다 많은 음식이 들어있었고, 아무래도 장시간 상온에 노출되어 폐기해야 할 음식들도 제법 돼 보였다. 


일단 급한 대로 정리를 하고는 A/S센터로 전화를 했다. 영업시간 종료라 오늘 방문은 어렵다고 했다. 급하다며 빨리 조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침에 일찍 담당 기사님이 연락을 하고 방문하도록 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상 A/S 기간이 끝난 상태라 출장 기사님의 출장비는 18,000원이고 부속을 갈거나 하게 되면 추가 비용이 발생될 거라는 안내를 받았다. 냉장고를 구매한 지 5년이 채 안된 상태라 큰 탈이 나겠냐 싶었다. 수리를 받으면 또 몇 년을 쓸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출장비 정도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호들갑을 떨다 보니 어느새 훌쩍 시간이 지나버렸다.

이미지 :Pixabay

아침 일찍 출장이 잡혔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출장지로 출발하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A/S기사님이다. 바로 출발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옆지기에게 전화해서 기사님 오시니까 설명 잘해 드리라고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옆지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잘 마무리됐겠지 싶었다. 그런데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옆지기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우리 냉장고 사망했데요."

"왜?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못 고친데?"

"응. 냉매가 없어 채웠는데 금세 다 빠져서 확인했더니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데, 냉장고는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수리가 안된다고..."

"그럼 냉장고 새로 사야 하잖아."

"그나마 다행인 건 사용년수가 얼마 안 돼서 보상을 해 준데요."

"보상해주면 얼마나 해주겠어."

"사용년수 감가상각 해서 환불해 준다는데요."


오래 쓰지도 못하고 고장 난 냉장고에 기분이 상했다. A/S조차 어렵다는 말과 귀찮은 구매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감가상각을 고려해서 환불해 준다고 하니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됐지만 뒤끝은 찜찜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옆지기가 다급히 부른다.

"왜?"

"그런데 구매 영수증이 필요하다는데요."

"영수증? 그걸 지금까지 보관 할리 없지. 그런 건 회사에서 관리하고 처리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제한이 많다고 해요.

영수증이 없으면 제품 출시년을 기준으로 환산된데요."

"그럼 카드로 구매했으니 조회되겠지 뭐. 시간 될 때 확인해 볼게."

이미지 :Pixabay

2017년 5월에 구입했던 것은 기억이 났다. 문자를 확인했더니 2017년 12월까지 구매내역이 남아있고 그 이전의 것은 없다. 카드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더니 1개월 이내의 거래에 대해서만 제공한다고 했다. 카드사에 전화해서 요청할까 하다가 정확한 날자도 모르고 기간을 다 조회하기도 힘들 것 같아 구매했던 매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구매했던 매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본점으로 전화를 했더니 담당자가 여러 가지 체크와 검색을 하고서야 구매 목록이 있다고 했다. 


폐쇄지점 기록이라 영수증 출력은 어렵다고 해서 화면을 사진 찍어 전달받았다. 화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A/S기사님께 보내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약 50% 정도 환불이 될 거라고 했다. 냉장고 반환이라는 조건을 걸고서 말이다. 어차피 고장 난 냉장고라 쓰지도 못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 통장 사본을 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어 전달했다. 그렇게 냉장고 사망사건은 일단락 정리가 됐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냉장고가 전조 증상을 알려오긴 했던 것 같다. 가끔 냉동실에서 물이 흘러내려 바닥이 살짝 젖어 있었다. 그때는 그런 증상을 아이들이 냉동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서 온도가 떨어져 생기는 현상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사건이 터지던 전날 저녁에도 그런 현상이 또 발생했었다. 냉동실 얼음도 그대로 있는데 왜 물이 흐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고서는 무심했던 것이 이 사태를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 보면 그때 알았다고 했어도 냉장고는 고장이 났을 테지만 냉동실의 음식이라도 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좀 남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 주변 환경에 좀 더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작은 변화들이 경고를 하기 때문이다. 전조증상이 별거 아닌 듯해도 세심한 주의만 한다면 얼마든지 사전에 수습될 수 있는 상황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좀 더 일찍 확인됐더라면 이렇게 번거롭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지 : 홈페이지 캡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그렇게 귀띔을 해 주어도 여전히 일이 터진 뒤에야 신경을 써야지 하는 걸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주변에 무심한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만이라도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권해본다. 혹시 애타게 부르고 있는 작은 신호를 감지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사용기간이 10년이 안 된 냉장고는 수리 불가 시 구매금액에서 사용기간을 차감하고 환불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당신의 냉장고는 안녕하십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물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