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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혁진 Oct 03. 2022

내가 아빠라니

썬데이 파더스 클럽

프리랜서로 일한 지 5년쯤 됐다. 새벽 6시 즈음 출근해야 하는 아내와 달리 내 일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보니 아침 육아는 내 당번이다. 아이는 오전 7시쯤 깬다. 아이 옆에서 함께 자는 나는 알람을 맞출 필요도 없다. 아이의 뒤척임과 칭얼대는 소리에 자동으로 눈을 뜬다. 


밤새 갈아준 아이의 기저귀가 둘둘 말린 채 발밑이나 머리맡에 놓여 있다. 전날 밤 잠에 들고자 아이가 열심히 빨아 대던 쪽쪽이는 이불속에 있기도, 아이 겨드랑이 속에 숨겨져 있기도 하다. 한쪽 손에는 기저귀와 쪽쪽이를, 다른 손으로는 아이를 어깨에 둘러메고 거실로 나온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아침 식사 준비다. 50일이 지나 통잠을 시작한 아이는 요즘은 하루 10시간쯤 거뜬히 잔다. 긴 시간을 잔만큼 눈을 뜨자마자 허기도 찾아오나 보다. 바로 분유를 대령하지 않으면 그렇게 우렁차게 울어댈 수가 없다. 


빠르게 분유통을 열고 젖병에 분유를 채운다. 한 스푼에 40ml, 그러니까 다섯 스푼을 담는다. 가끔 내가 몇 스푼을 담았는지 까먹기도 하지만 문제는 없다. 도로 분유통에 분유를 다 쏟아 넣은 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숫자를 세어가며 분유를 채운다. 그리고 밤새 끓여 온도를 맞춰 둔 온수를 젖병에 붓는다.


그와 동시에 칭얼대거나 때론 힘차게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나도 모르게 주문처럼 친근하고 높은 톤으로 말을 건넨다.


“아이고 우리 아들, 배고프지? 잠깐만 기다려 아빠가 금방 분유 타 줄게.”

“아이고 우리 아들, 밤새 배 많이 고팠지?”

“아이고 우리 아들, 아빠가….”


문득, 말을 멈추고 실소가 터져 나온다.


‘응? 내가 아빠라고?’


아직 몸에 딱 맞지 않은, 어딘가 수선할 부분이 남은 새 옷을 걸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이 바로 그렇다. 내가 아빠라니. 엄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빠’ 역시 고단함과 책임감으로 따지면 국어사전에 담긴 그 어떤 단어보다도 깊게 사무친 단어 중 하나가 아니던가.


* * *


갓 태어난 아이를 처음 마주한 순간, 그야말로 처음 ‘아빠’가 된 순간을 기억한다. 나의 아이 이서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태어났다. 우리 부부는 유도분만을 위해 예정된 출산일보다 하루 일찍 병원을 찾았다. 분만실 옆에 마련된 분만장은 일반 병실과 같은 구조였다. 분만장에는 먼저 입원해 있던 다른 임신부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하나둘 출산을 하러 분만실로 이동했다. 저녁이 되자 여섯 명 정원의 분만장에는 아내와 나만 남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아내 배에 동그란 카페 진동벨 같은 기기를 고무 밴드로 고정해두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진동벨은 아이의 태동을 살피는 센서 역할을 했다. 늦은 밤이 지나 새벽까지 대기하는 동안 아내와 나는 이따금 잠들곤 했는데, 간호사들은 그 센서로 아이의 상태를 계속 살피며 작은 문제라도 느껴지면 곧바로 아내를 찾아오곤 했다. 그중 한 번은 아이가 조금 전 심장 박동이 늦어져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는, 겁나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려주기도 하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완전히 잠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간호사 몇몇이 분주하게 분만장으로 들어왔다. 아이가 많이 내려왔다며 분만실로 이동하자고 했다. 아내는 침대에 누운 채 분만실로 이동했다. 나도 아내를 따라 분만실 앞으로 향했다. (아마도)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1회용 앞치마와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얇은 부직포 모자를 썼다.


“휴대폰 챙기셨어요?”

“네? 아, 아니요.”

“휴대폰 챙기고 기다리세요.”

“네!”


간호사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지도 못할 뻔했다. 분만실 안은 새벽임에도 아이를 받기 위해 급하게 출근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내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의 출생시간을 확인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벽 3시입니다!” 그렇게 나의 아이는 이 세상에 무사히 도착했다. 뒤이어 기다리던 멘트가 들려왔다.


“아빠 들어오세요!”


다급히 분만실로 들어가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가위를 들고 나를 기다렸다. 탯줄을 직접 자르겠다고 이야기해두었던 터였다. “여기 자르시면 돼요.” 가위를 건네받았다. 어디를 잘라야 하나 걱정할 새도 없이, 이미 두 개의 플라스틱 집게로 고정해둔 탯줄 사이를 잘랐다. 아이와 아내를 열 달 동안 이어주던 연결고리를 잘라냈다. 이제 아이는 스스로 호흡하고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이다.


그제야 이제 막 삶을 시작한 내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몸 여기저기 핏기가 남아 있는 아이를 간호사는 (내가 느끼기엔) 조금 거칠고 빠른 손놀림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입안에 남아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고,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튕겨가며 잘 반응하는지도 살폈다. 휴대폰으로 그 모습을 찍고 있던 내게 간호사가 말했다.


“아이에게 말 좀 해주세요.”


영상과 사진을 찍어대는 데 여념이 없던 내게 주어진, 아빠로서의 첫 임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한 것도 잠시, 아이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딸기(태명)야, 아빠야.”


아이에게 처음으로 내가 당신의 아빠라는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스스로 아빠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 * *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아이가 필요로 한다면, 스스럼없이 내 목숨을 줄 수 있겠다고.


여전히 내가 아빠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이거나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는 이제 곧 8개월이 된다. 이는 나도 곧 8개월 차 아빠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굳이 따지자면 나에겐 아빠가 되기 전 40년의 삶이 있다. 아빠로서의 나를 마주하는 것이 가끔 어색한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 밑에 붙여둔 아이 사진을 보거나, 자동차 뒷좌석에 설치된 카시트를 볼 때, 휴대폰 배경화면에 있는 아이의 미소를 볼 때면 그 존재를 새삼 더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더 노력하려고 한다.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함께 웃고 우는 경험을 더 많이 하려고 한다. 더 자주 안아주고, 더 자주 아이 볼에 입 맞추고,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한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에 스스로 어색해하지 않도록. 조금씩, 오랫동안 내 안에 아빠라는 단어의 크기를 키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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