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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혁진 Nov 13. 2023

도보 5분 거리의 슈퍼 히어로

요 며칠 야근을 하느라 집에 꽤 늦게 들어왔다. 그때마다 이서는 깨어 있었다. 늦어도 밤 10시면 잠들었어야 할 아이가 11시가 넘어도 자지 못했다. 콧물 때문이었다. 보통 코가 막히면 면봉이나 콧물 흡입기로 빼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콧구멍보다 더 깊은 어딘가에 콧물이 가득 차 있는 거다. 가만히 있다가도 투명하고 하얀 콧물이 아이의 양쪽 구멍에서 쉴 새 없이 나왔다. 나도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자려고 누우면 안쪽 어딘가에서 코가 막혀오고 숨도 쉴 수 없어 무척 괴롭다. 아무리 코를 풀어도 그때뿐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너무 졸려서 자려고 누우면 코가 막혀오니 숨도 쉴 수 없고, 그러다 종종 잠에서 깼다. 아마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을 거다. 아이는 눈도 못 뜬 채 온몸을 비틀고 소리를 지르고 울어댔다. 그 과정을 새벽까지 반복했다. 콧물이 처음 나온 날부터 며칠은 새벽 4~5시가 돼야 겨우 잠들었다. 


즉, 나도 같은 시간에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아이는 그 시간에 잠들어 늦게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나는 다르다. 회사에 가야 하고 일을 해야 한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재택근무가 자유로운 편이다. 이날은 도저히 출근할 자신이 없어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다행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장인어른과 장모님. 우리 집 가까이 사시는 두 분이 평일에는 거의 종일 아이를 돌봐주신다. 장인어른께서 매일 아침 우리 집에 오셔서 아이를 챙겨 댁으로 가시는가 하면, 매주 아이를 데리고 문화센터에도 함께 가주신다. 우리 부부 중 한 명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다시 데리러 가지만, 둘 다 야근해야 할 때면 밤늦게까지 아이를 봐주시기도 한다. 


이 날 아침도 장인어른은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집에 오셨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아침 일찍 동네 소아과로 향하셨다. 두 분과 아내 그리고 내가 함께 있는 단체 카톡방에 알림이 떴다.


“대기번호 16번. 40분 후에 진료 예정….”


병원에 잘 도착했다는 장인어른의 메시지였다. 연이어 사진 한 장과 카톡이 도착했다. 사진 속 큰 냄비에는 죽이 끓고 있었다. 밤새 고생한 손주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죽을 끓이고 계신 장모님의 메시지였다.


“이서 먹일 죽 만드는 중입니다. 이서 아빠, 엄마는 걱정 말고 하루 잘 보내길.”


두 분은 우리 부부에게 귀인이자 히어로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아이를 위해 죽을 끓이는 두 명의 슈퍼히어로.


초보 엄마, 아빠가 슈퍼히어로 두 사람과 카톡을 나누고 있다 ©강혁진


2021년 7월 초, 만삭인 아내와 함께 남양주에 있는 처가에 들렀다. 얼마 전 이사를 마치고 온 집안 페인트칠을 장인어른이 직접 하셨다고 했다. 손수 칠하셨다고 하기에는 전문가가 시공한 것처럼 마감이 무척 깔끔했다. 장인어른은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 은퇴하셨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 걸 염두에 두신 듯 공간을 깔끔하게 꾸며 두셨다.


처가에서 식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곧 세상에 나올 아이의 육아를 장모님께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신 게 떠올랐다. 그리고 조부모님에게 육아를 부탁하려면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고 말한 어느 유튜버의 말도 떠올랐다. 주변을 자세히 보니 상가도 많고 아파트도 많았다. 당시 살고 있던 서울 집 못지않게 편의성이 갖춰진 느낌이었다. 


아내에게 물었다. “이 동네로 이사 오는 건 어때?” 아내는 결혼 전까지 이 동네에 살았다. “근데 오빠는 괜찮겠어? 서울이랑 너무 멀어지는데?” 그때 나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다. 서울과 조금 멀어져도 괜찮았다. 처가에서 육아를 도와주시겠다는데 서울과의 거리 따위를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다. 대중교통이나 자차를 이용하면 서울까지는 30~40분이면 충분했다.


그날 아내와 네이버 부동산을 뒤져 매물을 찾았고 며칠 뒤 처가 근처의 집 몇 곳을 살폈다. 우리 상황에 맞는 집을 찾았고 이삿짐센터를 예약했다. 처가 집들이를 한 지 13일 만에 우리는 서울에서 남양주로 이사를 왔다. 처가와 도보 5분 거리의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마치고 나흘 뒤, 이서가 태어났다.


이서가 15개월이 된 지금까지 조부모님은 주 5일 내내 아이를 돌봐주신다. 두 분에게 용돈뿐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드리고 있지만, 아이에게 쏟는 시간과 체력 그리고 정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조부모님께서 첫 손주인 이서를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봐주고 계셔서 더욱 감사하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전생에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가. 두 분이 안 계셨다면 아내와 나의 육아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멀지 않은 시기에 두 분을 육아에서 해방시켜 드리는 것이 우리 부부의 목표다. 그때부터는 아이가 크는 모습을 편히 바라보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다. 어쩌면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키우는 건 이서뿐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내와 나 역시 두 분의 희생과 배려로 커가고 있다.


두 분의 희생과 배려를 갚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아이를 제대로 키워내는 것이 아닐까. 내가 받은 희생과 배려를 이서에게도 온전히 돌려주고 싶다. 서툴겠지만 천천히, 내가 두 분에게 받은 사랑에 다시 우리 부부의 사랑을 얹어 아이에게 돌려줄 것이다. 아이가 더 크면 그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 잘 말해주겠다.


오늘도 이서는 사랑 위에 얹어진 사랑을 먹으며 커가고 있다. 그 덕분인지 이서의 콧물도 거의 멈췄다.


202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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