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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혁진 Nov 13. 2023

이서의 말들

 아이가 빠르게 크고 있다는 걸 느끼는 신호가 여럿 있다. 여름 한 철 신었던 크록스가 그새 작아져서 아이의 뒤꿈치에 빨간 자국을 남길 때, 작년 여름엔 팔목까지 오던 윗도리가 올여름엔 7부 사이즈가 되었을 때, 그리고 매번 새로운 표현을 입 밖으로 내는 아이를 볼 때. 특히 ‘어쩜 저런 말을 다 하지?’ 싶을 때는 깔깔대고 웃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재미있기만 하냐면 그건 아니다. 가슴이 뭉클해지거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놀랄 때도 있다. 그때는 미처 예상하거나 예측하기 어렵다. 웃고 울고 놀랐던 이서의 말들 몇 개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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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행복해!
아이와 첫 해외여행을 다녀온 지난 6월. 잠자리에 누운 아이는 제 부모가 양쪽에 누워 함께 자는 경험이 낯설면서도 좋았던 모양이다. 불을 끄고 모두가 자려고 누웠고 아이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순간, 아이가 대답했다. “응, 많이 행복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기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순간의 이야기는 레터로도 남겨두었다. 


굿나잇 대디
아직 아이에게 영어 공부를 따로 시키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신 또래에 비해 말이 조금 빠른 아이가 조금이라도 영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아주 간단한 단어들은 영어로 표현하곤 한다. 이서는 밤이 되어 졸리면 기특하게도 자기가 나서서 나 또는 아내의 손을 잡고 잠을 자러 들어가곤 한다. 하루는 아이가 아내의 품에 안겨 잠을 자러 들어가면서 나에게 인사를 남겼다. ‘굿나잇 대디'라면서. 평소 가르쳐 주던 표현이었지만 앙증맞고 가녀린 목소리로 “뒤꿈치에 대디”를 외치는 아이에게 달려가 한 번 더 포옹을 해주고 뽀뽀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고맙습니다 아빠
지난 달, 퇴근하고 집에 오니 이서가 어린이집에서 선물받은 팔찌를 자랑했다. 팔찌를 아이의 팔목에 채워주었더니 대뜸 ‘고맙습니다 아빠'라며 인사를 건넸다. 보통은 반말로 이런 저런 표현을 하던 아이가 존댓말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니 신기하고 기쁜 마음도 들었지만 되려 기분이 울적하기도 했다. 이서가 커가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다 못해 증발하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빠 나 너무 피곤해요.
지난 주말에는 아이와 호암미술관엘 갔다. 김환기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고 미술관 앞 정원의 멋진 조경을 구경하고 집에 오는 길. 뒷좌석 카시트에 앉아 있던 아이가 갑자기 외쳤다. “아빠, 나 너무 피곤해요. 빨리 집에 가”' 아내와 나는 이번에도 예의 깔깔대는 웃음을 쏟아내며 아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집에 가고 싶은데
오늘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전시를 보고 왔다. 전시를 보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안, 이서 또래의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울면서 연신 ‘나 집에 안 가고 싶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서는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그 아이와 조금 거리가 떨어지자 마자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집에 가고 싶은데.”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이서의 얼굴을 쳐다보자 이서는 자기도 그 상황이 웃겼는지 배시시 웃었다. 다른 아이의 말을 알아듣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 한 것도, 상대 아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거리가 되자마자 아빠에게 나지막히 속삭인 것도 참 신기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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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말들을 다시금 떠올리는 일은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을 다시 호출하는 일이기도 하다. 대학생 시절, 유럽여행을 하며 드림걸즈의 OST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드림걸즈 OST를 들을 때마다 유럽 평야 어딘가를 지나며 바라보던 바깥 풍경이 꽤나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이다. 아이의 말을 기록해두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아이의 말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깔깔대던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다시금 울리는듯하다. 


자칫 흘러갈 수 있는 아이의 말들을 기억하고 싶어 기록해 두곤 한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 레터에 적을 때도 있지만 내가 레터를 발송하는 차례는 5주에 한번 돌아오다 보니 따로 쓰는 육아 일기에 한번씩 적어두곤 한다. 그덕분에 오늘 레터에도 잊지 않고 소개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기억나는 아이의 말들을 계속해서 육아일기에 기록해두려 한다. 그때의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


+)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는 아이가 없는 분들도 계실거다. 그렇다면 친구나 지인들이 해주었던 기억에 남는 말을 기록하거나 저장해두시길 추천한다.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하고 나오면서 앞으로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던 나에게 지인 몇이 카톡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때 그들이 남겨준 메시지를 대화방에 공지로 등록해두고 웃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바꾸지 않았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웃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형은 존X 잘난 놈임을..’, ‘강혁진 아이가. 강혁진이야. 강혁진.’ 퇴사하고 힘에 부칠 때마다 그들의 메시지는 힘이 돼주었고 지금도 종종 그들이 남겨준 응원의 메시지를 보곤 한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에게 전해진 말들을 한번 기록해보시길.


202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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