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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Sep 14. 2019

집밥, 날다

리틀 포레스트(2018)

  엄마가 오셨다. 타국에 사는 딸을 보러 3시간의 버스와 11시간의 비행을 마다하지 않고 올해도 어김없이 오셨다. 23킬로그램, 에누리 없는 무게의 가방 네 개를 짊어지고 씩씩하고 행복하게 그렇게 나를 보러, 쉼 없이 재잘대는 손주들을 보러, 무엇보다 엄마 밥에 굶주린 나를 먹이러 그렇게 또 먼길을 열심히 오셨다.


  엄마가 오면 나는 한없이 게을러진다. 아니 게으르고 싶다. 이른 새벽 눈은 떠지지만 주방의 기척이 들릴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달그락 거리는 그릇 소리와 도도도도 도마 소리가 들릴 때까지 꼼짝하지 않는다. 느긋하고 싶다. 게으름에 행복하고 싶다. 엄마의 밥 냄새, 익숙한 냄새가 날 때까지 침대에 머문다. 마침내 엄마의 기척이 들리고 내가 사랑하는 엄마의 멸치볶음이나 참기름 냄새가 풍기면 그제야 어슬렁 거리며  일어난다. 잠옷을 벗지도 않은 채 평화로운 아침을 만끽하러 거실로 나간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자식임을, 먹이고 싶고 입히고 싶고 위로하고 싶은 누군가의 딸임을 온몸 가득 느낀다. 그리고 아직도 내게 응석 부릴 엄마가 계심에 안도한다.


  엄마는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엄마가 끓여준 뜨끈한 아침 보리차는 너무도 달다. 엄마가 따라준 물 한 대접을 벌컥벌컥 마신다. "엄마는 물도 맛있게 끓이네" 나도 모르게 외쳐진다. 식탁에 차려진 엄마의 파김치와 갓김치는 손으로 그냥 막 집어먹고 싶게 한다. 제주도서부터 가져오셨다는, 비행기를 무려 두 번이나 탄 제주 갈치는 살이 통통히 올라 먹음직스럽다. 사위와 딸 손주들을 먹이려고 한 마리에 사만 원짜리 통 갈치를 두 마리나 사셨단다. 내가 좋아하는 조를 가득 넣고 지은 잡곡밥에 갈치 도막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아이들 먹이느라 내 입에 가져가는 양이 적은 걸 보곤 내 밥에 따로 생선살을 발라 올려주느라 엄마는 바쁘다. 나는 더욱 응석받이가 되고 싶어 진다. 김치도 찢어 달라한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하는 그것들을 내 엄마에게 해 달라한다.


  그저 먹는 것만으로도 고된 마음이 몽글몽글 해진다.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타국 살이가 가끔은 지쳐 가시 돋친 마음들이 다시 부드러워진다. 예쁘게 말하고 예쁘게 더 생각하고 싶어 진다. 엄마의 밥은 내게 그러고 싶게 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내게 엄마의 집밥, 엄마의 요리가 이런 의미여서 일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의 혜원의 마음이 딱 내 마음이다. 도시생활에 지친 혜원이 결국 갈 곳은 옛집뿐임을. 그곳에 비록 엄마는 계시지 않더라도 엄마의 손맛은 남아있기에 망설임 없이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고향집에는 엄마의 레시피가 고향땅 여기저기 숨겨져 있으니 말이다. 엄마의 레시피를 찾아 작물을 재배하고 요리를 해 나가는 과정은 혜원에게 치유를 선사했다. 사계절의 변화에 감사할 줄 알며 덥고 추운 날씨도 오롯이 즐길 줄 알게 했다. 남자 친구와의 이별의 순간에도 진짜 어른다운 이별을 맞이 할 수 있게 했다. 혜원은 엄마의 레시피로 좀 더 성숙해지고 여유로워졌다.


  영화 속 혜원의 엄마는 자신의 음식을 통해 혜원이 더 굳건해지고 담대해 지기를 바랐다. 잠시 쉬어 가고 싶을 때 자신의 뿌리가 내려진 곳이 음식으로 기억되기를 말이다.


  나의 엄마 역시 일 년에 한 번 나에게 날아 나를 먹이고 다독인다. 그리하여 더 충실하고 단단하게 살아가도록 날 다듬고 가신다. 나에게 오기 전부터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묻고 무언가를 재우고 담다. 그것들을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비행기에 싣는다. 바리바리 싸온 먹을거리를 풀 때면 포부도 당당하다. '내 이 많은 것들을 내 새끼다 먹이고 가야지' 하는 신념 같은 것들이 보인다. 난 그 신념과 정성을 한껏 먹고 더욱 자란다. 더 용감해지고 따듯해진다. 멀리서도 음식의 기억으로 나를 위로하는 그녀가, 엄마가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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