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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06. 2019

침묵의 위안

만추(Late Autumn. 2011)

  때론 낯선 이로 하여금 큰 위로를 받는다.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 속속들이 말하지 않아도 그저 따뜻한 눈빛과 사려 깊은 행동으로 위로와 감사를 느낀다. 아니 어쩌면 나를 모르기에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마주칠 일이 없기에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오롯이 나로 보일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이들. 우연히 여행지에서 만나거나 그저 스쳐 지나갈 이들 말이다. 그들에겐 왠지 허리띠를 풀고 느슨하게 대해도 될일 이다. 어떠한 죄책감이나 책임감도 없고 인간에 대한 소소한 예의와 배려만이 가득한 시간이라면 어쩌면 내 본명을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들이 무심코 던지는 시답잖은 농담에 적당히 답하며 킬킬 댈 수도 있다. 침묵조차도 편안하게 느껴진다. 낯설지만 단순한 관계가, 되려 내게 큰 충만함을 준다.




  고백하자면 나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 있을 때 흐르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는 것. 말의 행간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왠지 내가 재미없어 상대방이 입을 닿는 듯한 착각. 그러므로 난 열심히 떠들고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상대방에게 유익함을 줘야 한다는 의무감 말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강박인가 싶다. 핑계를 찾자면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져야 할 일들이 많아서였을까. 아니 그저 어리석은 이의 쓸데없는 노력이라 치부하자. 침묵과 경청으로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위안의 크기를 나는 짐작 할 수 없었다. 무관심이 아닌 마음 깊숙한 곳에서 흐르는 사려 깊은 위로임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수감된 지 7년 만에 짧은 외출이 허락된 애나와 어딘지 쫓기는 듯한 훈의 사이에 어떤 말이 필요했을까. 그 둘은 서로에게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고 침묵으로 위로했을 뿐이다. 그것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동정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 따뜻한 배려와 예의를 갖추었다. 굳이 알려 들지 않았고 알리려 하지 않았다. 모국어가 다른 이 둘은 제 삼의 언어인 영어로 대화를 이어간다. 그 대화조차도 참으로 간결하다. 단정한 대화가 무채색의 영화를 더 돋보이게 한다. 말은 없지만 보는 이들은 알 수 있다. 적어도 내겐 시애틀을 감싸 안은 안개가 서로에게 뻗어나가는 마음결 같다. 서로에게 스며드는 배려가 아름답다. 중국어 '하오'와 '화이'의 사용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좋았다. 애나가 바라던 것은 낯선 이라 하여도 그녀를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며 온전히 들어주는 이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만추' (2011) 스틸컷


  나는 이제 고요함이 주는 위로를 어렴풋이 안다. 간혹 해가 좋은 날 창을 열고 잔디를 바라보면 햇살의 움직임을 마주 할 때가 있다. 그 움직임은 너무도 우아하다. 소리 나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주목하게 된다.

많은 소리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귀한 시간을 내게 내어주고, 내가 상대방에게 내 시간을 내어 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크나큰 위로를 받고 있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시행착오 없는 인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또 이렇게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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