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혼잣말처럼 뱉은 그리움의 말들을 아이가 들었나 봅니다. 저녁 식사를 하다 아이가 묻습니다.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지?
무슨 말인가 싶어 아이를 쳐다봅니다.
-나도 할머니 보고 싶은데 엄마는 할머니가 엄마니까.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지?
합니다.
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가가 홧홧해 집니다.
-응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네
제 대답에 아이가 말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크리스마스에는 할머니 볼 수 있을 거야
아이의 성탄선물 같은답변에 마음이 환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만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존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싫고 좋고의 감정부터 사랑하고 좋아하고 밉고 불편한 감정까지 어떠한 꾸밈도 없이 표현합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가식적인 표정을 만들지 않는 아이들은 그저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자신들의 마음을 부모에게 말합니다.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요. 쑥스러움이나 자존심 따윈 없는 슬플 땐 슬픔 그대로, 기쁠 땐 온몸으로 기쁨을 내보내는 아이들이 참 부럽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열아홉 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이제 세상이 공식적으로 성인 됨을 인증해 주니 이제 감정표현도 어른답게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더 그렇더군요.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직장인은 상대방에서 하수로 찍힌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사회생활도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화나도 화나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기뻐도 그런 것쯤이야 대수라는 식의 왠지 그래야만 '쿨'해 보일 것 같은 이상한 셈법을 마음속에 성서 인양 되새겼습니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내 감정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 표현의 제동에 긍정적인 말들도 갇혀 제 안에만 머문다는 것을 몰랐더군요. 아이의 꾸밈없는 질문을 통해 그동안 서툰 감정으로 타인을 대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생각하면 어른이라고, 쑥스럽다고 하지 못했던 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그립다는 말. 기쁘고 행복하다는 말까지. 아이들은 너무도 자연스레 하는 표현들이 어른인 저는 입 밖에 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내 취약함이 드러날까 강한 척, 태연한 척했던 것들이 결국은 그릇된 자존심이 아니었을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휴대폰 화상 통화 버튼을 누릅니다. 그리고 먼 곳에 있는 내 그리운 이들에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