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저희 집 아이들도 한 번 이야기해서는 행동을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키우는 사람 인내력 시험일까요? 늘 두세 번씩 말해야 합니다. 식사시간에 제때 식탁에 앉게 하거나 어질러진 장난감을 제자리에 정리 정돈을 하지 않는 것은 약과이죠. 제가 주로 아이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때는 남매라고 딱 둘인데 다툴 때입니다. 싸움의 원인은 앉혀 놓고 훈육하기에도 늘 너무도 사소한 것입니다. 부모가 되어보니 그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서로 양보하지 않는 모습이 괘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아주 교양 있는 척하는 목소리로 ‘서로 양보해라’ 한마디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들을 턱이 있나요. 아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집니다. 마음속으로 딱 50까지 셉니다. 셀 수 있는 한 가장 느린 속도로 세지요. 그러다 “으앙~” 둘째의 울음소리가 터지고 첫째의 “저리 가”라는 소리가 들리면 제 인내력의 끈은 툭 끊어지고 맙니다.
“이것들 엄마가 하지 말랬지?”
아~제가 꿈꾸는 엄마는 절대 소리 지르지 않고 늘 교양 있게 말하는 모습이었는데 희망사항은 희망일 뿐이죠. 아이들에게 다가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느냐며 다그칩니다. 터져 나온 득음에 아이들이 ‘움찔’ 합니다. 어느 엄마가 우아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높아지는 목소리에 저 또한 마음이 좋지 않게 됩니다.
엄마에게 한소리 듣고 풀이 죽어 식탁에 앉는 아이에게 ‘속상했느냐’ 물으니 아이는 말합니다.
아이들이 들리는 체감 데시벨은 아마도 제가 느끼는 것보다 한참 높은가 봅니다. 저는 한 톤 올렸다고 생각하는데 아이가 느끼는 것은 세톤 혹은 그 이상인가 봅니다. 무섭다거나 속상했다기보다 ‘놀랐다’는 아이의 말이 어떤 감정의 말보다 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목소리 톤이 올라간 밤이면 잠든 아이들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됩니다. 많이 컸지만 여전히 숨에 우유냄새가 섞여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그냥 좀 더 참을 걸’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평온한 얼굴로 잠든 아이들을 보면 ‘나 아직 덜 자라 좀 더 크라고 보내준 존재’ 같습니다. 매일매일이 인내력 테스트와 체력장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나도 아직은 미숙하니(엄마가 프로 엄마가 되는 날이 올까요?) 서로 그냥 퉁 치자는 뻔뻔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이 뻔뻔한 마음에도 아이가 엄마로 인해 놀랄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저의 솔직한, 아니 이 세상 엄마들의 바람이겠지요. 모든 아이들이 엄마로, 부모로 인해 늘 안온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