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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n 02. 2020

무서워

  새로운 환경은 누구에게나 설렘을 주지만 그만큼 긴장도 주기 마련입니다. 어른도 그러할진대 아이들은 오죽할까요? 너무도 당연한 적응시간의 필요성을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꾸 잊게 됩니다. 부모들이 흔히 하는 어리석은 실수일 테지요. 기다려 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채근하게 되니 말입니다.


  첫째가  살이 막 지나 저희 가족은 그동안 살던 아파트를 벗어나 주택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집이었습니다. 이사를 온 첫날 아이는 집 안 이곳저곳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신만의 방이 생겼다는 사실도 아이를 기쁘게 한 듯 보였습니다. 돌쟁이 둘째를 데리고 이사를 하느라 정리는 더디기만 했지만 그동안 살 던 장소에 비해 넓어진 집에 숨통이 트였습니다. 첫째는 새 집과 새 유치원에 잘 적응하며 비교적 무난히 지내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 여가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거실 화장실 근처 카펫이 축축했습니다. 물을 잘 못 흘렸나. 그런데 그다음 날도 비슷한 자리에 물을 흘린 듯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무심히 주저앉아 물을 닦는데 웬일인지 오줌 지린내가 코를 확 덮쳤습니다. 그것은 물이 아니고 소변의 흔적이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저는 강아지도 고양이도 키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필히 사람의 소변일 텐데. 화장실을 코앞에 두고 누가 거기다 볼일을 보았을지 어리둥절했습니다. 막 돌이 지난 둘째는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고 범인은 이미 두 살 때 기저귀를 뗀 네 살 첫째일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왜 화장실이 바로 앞인데 거실에 쉬를 했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기까지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왜 거실 모퉁이에 쉬를 하고 엄마에게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날 저녁 아이를 재우며 저는 첫째에게 물었습니다.


  “엄마가 오늘 무럭이가 화장실이 아니고 다른 곳에 쉬 한걸 찾았어. 왜 화장실에 쉬를 안 했을까?”


  흠칫하는 첫째. 요 녀석이 범인이 틀림없구나 싶었습니다. 낮 기저귀와 밤 기저귀를 동시에 뗀 아이라 실수하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장난이라 하기엔 너무도 어이없는 짓이라 혼 좀 내야겠다 생각했지요. 첫째는 부끄러운지 머뭇머뭇, 그러다 우물쭈물 말합니다.


  “무서워서, 엄마 집이 커서 무서워. 그래서 화장실도 무서워.”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공간은 항상 상대적이라 어른들이 느끼는 집의 크기보다 네 살 아이가 느꼈을 집의 크기는 훨씬 더 컸었나 봅니다. 특히 첫애는 태어나 그때까지 늘 좁은 아파트에서만 생활해 왔습니다. 자신이 놀 수 있는 장소가 넓어진 것이 기쁘지만 한편으론 방의 개수도 많아지고 화장실 개수도 많아진 집의 구조가 아이에겐 낯설었나 봅니다. 제 눈엔 새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모습만 보였지 아이가 어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육아를 하며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이것입니다. 아이를 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른처럼 대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아이는 큰 집이 좋기도 하지만 어딘지 구석구석 나뉜 새로운 공간이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이는 새 집에 완전히 적응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엄마인 제가 아이의 감정은 살피지 못하고 새 방을 마련해 주며 혼자 자기를 독려했으니 아이가 화장실이 무서웠을 것이 당연했습니다. 밤, 요의가 느껴져 일어는 났지만 차마 무서워서 화장실은 가지 못하고 거실에 쉬를 했을 아이에게 미안해졌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아이는 더 이상 화장실이 아닌 다른 곳에 쉬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새 집에 적응하고 완전히 자신의 집이라고 인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무섭다는 아이를 다그치기보다 그저 "괜찮다"는 말과 약간 기다림이 아이에겐 더 필요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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