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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이 명화스러운 Aug 28. 2021

어른이 된 타인이 불안한 아이

선택적 함구증 아이 불안 극복하기

생각해보면, 기억하는 모든 순간 나는 타인을 두려워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런 기질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그런 느낌 또한 익숙해진다.

그냥, 그 감정과 일부로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모두가 기질의 문제는 아니다. 환경의 문제 이기도 하다.


나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그냥 얘기만해도 소리지르는 듯한 남자들 속에서 살았고, 자랐다. 그리고 주변에 누구도 다정하지 못한 남자들과 함께 였던 것 같다.

절대 이 글에서 경상도 남자들을 매도하거나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주변에 친구들만해도 다정하고, 조용한 남자 사람 친구들도 있으며, 다정한 남자들도 많았다.


내가 말하는 사람들은 내 주변 사람들에 한해 얘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빠와 친척들 등등의 주변 사람들 말이다.



내 선택적 함구증의 불안 대상은 어른 남자였다. 이제 어른이 된 나에게 어른 남자는 나보다 어리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특정한 집단의 어른 남자를 만나면 불안을 느낀다. 그건 없어지는게 아닌거 같았다. 다만, 각자 극복해나갈 뿐이다.

나의 경우는 일부분 극복하였지만, 일부분은 여전히 불안으로 남아았으며, 아마도 100% 극복은 힘들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훨씬 더 잘 대처하는 법을 배웠고, 그런 환경에서 조금은 초연해지기도 했다.

어느 부분은 태연한 척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최소한 불안하고 불편해서 공포스럽지는 않다 더 이상은..


이런 공포감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아마 지금도 가끔은 오해를 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타인을 무시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불안이 나의 침묵을 유지하게 할 때가 있다.



어른 남자에 대한 불안감은 내 사회 생활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사회생활에서 남성의 비율은 90%는 되는 듯한 직장 생활에서 나는 생각한 바를 혹은 아는 바를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불이익도 많이 당했던 것 같다.

그런 억울함쯤은 내 불안으로 인한 침묵을 용납해준다면 사실 참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얘기하고 싶다. 어떤 아이의 선택적 함구증이 완전히 나았다고 생각한다면, 선택적 함구증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극복되거나 나아질 뿐이고, 그 불안은 늘 그 아이의 속에 존재하고 있다. 어른이 될수록 머리로는 이 불안이 그냥 나의 개인적인 불안이라는 걸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회생활에서 남자들과 일하며 살아남았다. 어떻게 보면 다양하게 만난 내 불안 대상들을 부딪히면서 그 상대들의 다양성을 알아가고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 듯도하다.

왜냐하면, 내가 불안해하는 어른 남자는 다정하고 좋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게 강요하거나 윽박을 지르지도 않았고, 강압적이도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 모든 사람이 타인인 나에게 그러면 안된다는 것도 그러지도 않는 것도 배웠지만, 그걸 정말로 내 마음으로 아로새기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시간 차가 늘 크다.

어른이 된 선택적 함구증 아이에게는 불안 대상으로 부터의 안정감을 주는 관계가 크게 도움이 되는 듯했다. 나는 아직 불안하지만, 나를 인격적으로 그리고 한 사람으로 존중해주고 배려해주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의 기억은 나를 조금은 안심시킨다. 여전히 불안하다고 하더라고 최소한 나의 뇌가 나에게 좋은 기억들도, 좋은 사람들도 있음을 얘기해준다. 그러면, 조용히 앉아 불안과 안심을 천천히 조율하곤 하는데 그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러니 사람을 만날 때 나는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곤 한다.

낯선 어른 남자를 만나면 어떤 일들이 있을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머리속으로 예행 연습을 해본다. 어떤 일이 있을지 어떤 감정이 내가 생길지, 이미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감정은 내게 너무도 익숙하다.

그래서 혼자 명상하듯 그 순간들을 떠올려 나 스스로에게 이런 불안이 밀려올테지만, 그건 나의 불안일 뿐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설명하고 설득도 한다.



다들 알겠지만, 불안한 일이라도 같은 일이 두 번째면 좀 쉬운편이다. 그래서 머리로 한번쯤 그 현장을 생각해본다. 확실히 마음을 안정시키는데에는 도움이 되곤 했었다.


나는 요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할때 그 전날에는 잠을 좀 설치는 편이다. 예전에는 그런 사실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었다면, 지금은 그냥 그러도록 조금 둔다. 

어쩔 수 없는 어떤 것처럼, 그리고 한번쯤 머리로 그 상황을 상상해서 감정을 예측하고 나면 아침에 일어나 두렵더라고 막상 낯선 사람을 만나는 순간에는 생각보다 두렵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스스로 참 안쓰러울 때도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연민하지도 않는다. 그건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일도 아니다. 그냥 감정이며 흘러갈 것이고 대부분의 일상에서 나는 괜찮으니까..



가끔 이런 불안함 때문에, 좋은 사람과의 인연을 놓칠 때가 사실 더 안타깝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억울해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글이 선택적 함구증에 대한 내 마지막 글이지만, 사실 결론은 없다.

나는 아직도 선택적 함구증의 증상을 안은체, 그 불안한 감정에 적응하며 조금은 극복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여전히 나는 그 불안의 대상들을 편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타인들을 오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를 작게 만들지도 않는다. 내가 그 불안을 극복해왔다면, 나는 더 큰사람이 되었을거라고 믿는다.

그 감정들을 넘어서는데만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데, 다른 일들도 함께 병행해 왔다면, 그런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당신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타인이 불안한 사람들에게 나 또한 불안한 타인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면서 살고 있다. 타인이 불안한 사람들에게 그 불안을 줄여줄 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타인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타인들이 훨씬 더 큰 목소리를 내며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들이 있는 한 선택적 함구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라도 그들에게 안심을 줄 수 있는 한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그랬듯 좋은 사람들과의 기억과 배려로 조금은 더 힘을 내서 타인과 어우러져 살 경험을 조금은 쌓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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