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착각
30살 이전까지는 날카로운 칼을 품고 살았던 적이 있다. 남들보다 사회생활을 일찍 하다 보니 좋은 일들도 있었지만 안 좋은 일들도 많이 겪었다. 어린 나이에 직업인이 되는 것이 설레기도 했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었다. 생애 첫 직장에서 얻었던 교훈은 한국에서는 학력이 무조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전문직을 가졌더라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조금 더 편했을까? 지금의 남편을 보면 남들이 보기에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공부도 꾸준히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살아보니 세상에 모르는 것 투성이고, 필요할 때마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할 말은 하고,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사람은 사회생활 10년 차에 접어드니 세상과 타협하게 되었다. 타협이라기보다는 포기에 가깝다고 해야 되나.
월급을 받는 직원으로서 아무리 말을 해도 회사는 바뀌지 않았다.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만의 관행적인 태도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제도나 사람도 바뀌지 않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혼자 소리쳐봤자 깨지는 것은 나였다. 그것을 깨닫고부터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 말해봤자지. 하나라도 바뀌어야 말할 맛이 나지. 그냥 저런 사람이니깐 그런가 보다 하자.'
‘나야 월급만 받으면 되니까 그냥 조용히 있자.’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던 나는 없어졌다. 어느 회사를 가던 돌아이 같은 사람은 꼭 한 명씩 있더라. 그런 회사 대표도 있더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뺄 수 없으니 나와 안 맞으면 그만두면 되니 회사를 다니는 동안 얼굴 붉히는 일은 이제 만들지 말자고 다짐을 하며 회사를 다녔다.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언제든지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던 시기였다. 아마 경력 12~13년 차쯤이었던 것 같다. 이때부터는 직장 상사, 선배, 후배들과 표면적으로 잘 지냈다. 대신 후배를 커버 쳐 주던 나도 같이 없어졌다. 직장 동료들에게는 일명 보살로 통했고, 후배들에게는 무심한 선배였다.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오지랖 넓게 행동했을 텐데. 선의적인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마음이 닿지 않으면 불편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배와 나이 차이가 10년이 넘어가면 서로 간의 생각 차이가 많이 나고, 세대 간의 문화도 많이 다르다. 아날로그 감성이 있는 70~80년 대생들과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90년 대생들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한다. 선배들의 관심과 간섭을 받았던 우리 세대와는 다르게 후배들에게 섣부른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고 하지만 상대는 침해를 당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깐 말이다.
회사에서 후배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철저히 나와 분리를 했다. 먼저 다가가는 일도 없어졌다. 그저 내 일만 할 뿐이었다. 선배가 뭐라고 하든, 직장 동료가 뭐라고 하든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때론 직장 상사에게 야단을 맞고 온 후배가 하소연을 하면 얘기만 들어줬다. 후배가 잘못한 행동을 한 것이 있다면 지적은 하고, 잘한 행동들에 칭찬을 해줬다. 가끔 저 사람은 왜 저래요.라는 말을 하면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똑같은 하루였다. 어떤 일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후배가 나에게 건넸던 말은 지금도 기억한다.
"선배, 나에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에요."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해? 어떤 점에서?"
"일을 할 때도 너무 말이 없고, 내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일 하는데 잡담이 왜 필요하지? 나는 그걸 모르겠네. 일은 잘하고 있는 것 같고,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면 돼. 뭐가 문제인지 일일이 내가 봐줘야 하니?"
"아니 다른 선배들은 일 하면서도 소소한 이야기도 하고 그러던데 선배는 너무 말이 없어서요."
"나는 그냥 직장 동료이자 직장 선배일 뿐이야. 개인적인 이야기는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하자. 나는 오히려 관심을 안 가져 주는 게 너희들에게는 좋은 거 아닌가?"
아마도 아무 말 없이 일만 하는 선배가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편하게 다가가기도 힘들었을지도.
경력이 10년 차가 넘어가면 거래처 담당자와 전화 통화도 많이 하고,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대화가 단절이 되기도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불필요한 말은 삼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에 새 후배가 들어와 일주일 정도만 보면 계속 함께 갈 사람인지 금방 그만둘 사람인지 알게 된다. 무당도 아닌데 귀신같이 안다. 그래서 거리감을 두게 된다. 하지만 후배는 무관심해 보이는 선배가 불편했을 것이다.
나의 무심한 행동이 때론 후배들에게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준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과 편하게 지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나 정도면 괜찮은 선배이지.라는 생각도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선배라고 쉬운 것도 아니고, 후배라고 마냥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다. 상황에 따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