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농업기술센터에서 주최하는 ‘세시풍속 정월대보름 연잎 오곡밥 만들기’ 체험 행사에 다녀왔다.
실습실에서 미리 잘 씻어 불려 놓은 찹쌀, 팥, 검은콩, 기장, 수수를 섞은 후 찜솥에 넣어서 쪘다. 쪄진 밥을 꺼내서 연근, 대추, 밤 등 부재료를 넣어 연잎에 싸고 다시 찌니 연잎 오곡밥이 완성되었다. 잡곡과 부재료의 색이 어우러지고 찰진 윤기가 흐르는 밥은 “나는 품격 있는 밥이야” 하는듯한 멋짐을 뽐내었고 연잎의 향이 은은하게 배어 씹을수록 입에 단침이 계속 돌며 깊은 맛을 느끼게 하였다.
다들 맛있게 시식하고 있는데 강사님이제안하신다.
“대보름날에 대해 생각나는 기억들이 있으세요? 돌아가며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정월 대보름날은 마을 행사가 많은 큰 명절이었다.
저녁에 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농악대가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고 상모를 돌리면서 흥겹게 마을 길을 따라 집마다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집주인은 집 마당에 떡, 막걸리 등 간단한 음식상을 차려놓고 농악대를 집안으로 들이면 농악대는 집안 곳곳을 돌며 지신에게 집안의 액을 없애고 복을 주도록 기원하여 주었다. 이를 ‘지신밟기’라고 한다.
아이들은 집마다 준비된 음식을 얻어먹고 구경하는 재미로 농악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곤 했다.
집에서는 엄마가 맛있는 오곡밥을 해주었다. 오곡밥과 온갖 맛있는 나물들, 대보름날 아침식사는 입이 행복한 성찬이었다. 보름 전날 저녁에는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고 해서 눈을 부릅뜨고 자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불속에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졸지 못하게 서로 깨우던 기억이 난다. 버티다 결국 못 이기며 자버린 아이들은 며칠은 수시로 거울을 쳐다보며 눈썹이 하얘졌는지 확인하며 긴장된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친구를 만나 ‘내 더위 사’ 하고 먼저 말하기를 얼마나 기대했던가!.
친구가 눈치를 재빨리 채고 먼저 ‘내 더위 사’ 하면 하늘이 무너진 듯 실망하였다.
‘더위 팔기’는 신나는 장난이었다.
더위를 ‘누가 사는지’보다는 ‘누가 먼저 말하는지’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던 아이들의 놀거리였다. 참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그랬어’라고 공감하며 새록새록 옛 기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스며든다. 하지만 이제 모두 오래전 추억이 되어버렸다.
‘더위 팔기’는 에어컨이 집마다 있는 현대에 더는 의미가 없어졌다. 밀집된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 거리를 가득 채우는 바쁘게 어딘가 달리는 자동차들의 틈새에서는 지신밟기를 할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도 시간도 없다.
무엇보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했다.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문화의 정서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간다. 옛 기억을 소중히 가지고 있는 나는 부질없이 마음이 쓸쓸하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속 깊은 곳에 남겨놓은, 자주 가지는 못해도 언제나 그리운 ‘고향’ 같은 추억들이기 때문일까.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옛 문화로’ 남겨질 사라져 가는 것에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남편이 옆에서 말한다. “오늘 강화 전등사 달집 태우기 행사에 가볼까요?” “좋아요!” 달집 태우기는 정월대보름의 전통적인 행사 중 하나로 사람들이 모여 한 해의 풍년과 행운을 기원하고 달집을 태움으로써 액을 쫓아내는 정화의식의 의미가 있다.
강화 전등사 주관으로 남문 주차장 옆에서 저녁 6시 30분에 진행된다고 한다. 저녁 6시쯤 행사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아직 많이 오지 않았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삼각형 움막 모양의 달집이 세워져 있었다. 수많은 색색의 소원지가 그 틈새에 가득 매여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농악대는 달집 주위를 돌면서 흥겹게 풍물 공연을 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날씨가 제법 춥고 눈비가 조금씩 흩날리는데도 행사 시간이 되어가자 언제 왔는지 많은 사람이 달집 주위로 큰 원을 그리며 모여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도 꽤 많았다.
간단히 식전 행사를 한 후 몇몇 사람들이 횃불을 만들어 달집에 불을 붙이니 순식간에 불길이 확 타올랐다. 넘실거리는 빨간 불 위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바람길을 따라 구불구불 흔들리며 빠르게 날아가는 검은 연기가 마치 만화영화에서 보았던 검은 망토를 입은 마귀가 허둥지둥 불길에 쫓겨 도망가는 듯하여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달집이 타기 쉬운 잔가지들로 되어있어 타오르는 불길에 ‘후드득’ 소리를 내며 힘없이 무너졌다. 작은 불꽃들이 타고 있는 잔가지의 잔해에서 무수히 생성되어 반짝거리면서 밤하늘의 공간을 채웠다. 마치 작은 반딧불이 무리 지어 춤추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멀리서 달집 주변을 서서히 돌며 각자의 소원을 비는 모습이 불빛에 반사되어 경건함을 자아내었다. 나도 정성스럽게 소원을 빌었다. ‘어쩔 수 없지’하고 인정하면서도 명절 문화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다. 옛 문화 속에서 좋은 부분은 적극적으로 개발시켜서 이어나가길 바라본다.
옛 문화가 ‘박제’되어 액자 속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닌, 현재 우리의 삶과 어우러져 이어지길 바란다. 무대 위에서만 보는 ‘강강술래 행사’가 아닌 모두가 참여하며 즐길 수 있는 ‘강강술래 놀이’가 되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흥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