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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마음 Dec 19. 2024

완전 부자 프로젝트

백화점은 사람들로 온통 북적거렸다.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옷 구경을 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피팅룸 앞에 줄을 섰다. ‘가방이 왜 이리 무거워, 어디에다 던져 버렸으면 좋겠네.’ 생각할 때였다. 흠칫 놀라 가방을 소중히 감싸 안았다. 백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있다는 것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갑자기 확인하고 싶어졌다.

      

가방을 열었는데, 어머나. 수표는 어디로 가고 대신 은행 전표들만 잔뜩 있었다. 눈이 번쩍 떠지고 얼굴엔 열이 확 오르고 다리는 후들후들. 옷들을 아무렇게나 매대에 던져두고, 가방을 뒤집었다. 지갑도 있고 핸드폰도 있고 핸드크림도 있고 통장도 있고, 하지만 없다. 정말 수표만 없었다.

      

정기예금 만기일이라고 돈을 찾고 또 입금을 했다. 오늘 다닌 은행은 네 곳. 이자도 따지고 수수료를 아끼겠다고 여러 은행을 오가며 한참을 기다리더니만 정신이 나간 것이었다. 도대체 수표는 어디 있을까? 문득  커피를 마시고 컵을 버리면서 보았던 지저분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곳은 사람이 많았던 C은행이었다. 벽면에 붙박이로 설치되어 깔끔했던 것은 P상가에 있던 A은행이었지만 그곳은 수표를 받기 이전에 들렀던 곳이었다.      


“저.. 저... 수.. 수표를 버렸는데요.”

반쯤 확신을 가지고 C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직원은 상황을 자세히 말해 달라고 했다. 

“거기요. 커피머신 앞에 휴지통 있죠? 봉투 두 장을 접어서 버렸는데.. 바닥에 커피가 남아있는 종이컵이랑 같이 버렸어요. 봉투 하나는 비었고 다른 하나는 수표가 들어있어요. 백만 원짜리 두 장이에요.”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새 휴지통을 비웠으면 어떡하나, 기다림의 시간은 길기만 했다. 

“예, 있습니다. 빨리 오세요.”      


천상의 팡파르가 따로 없었다. 잰걸음으로 쇼핑몰을 나왔다. 12월 31일 오후의 길에는 차들이 넘쳤다. 은행까지는 두 정거장쯤 되는 거리. 버스를 타도 택시를 타도 그 꽉 막힌 길을 뚫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럴 땐 두 다리가 최고라고, 바람이 차가웠지만 따질 겨를이 없었다. 수표가 빨리 손에 들어와야 안심할 수 있겠는데. 혹시라도 직원이 착오였다고 하면 어쩌나. 마음 졸이며 숨이 차오르게 걸었다. 그런데 C은행에 도착하니 이미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나는 이대로 이백을 날리는 것일까. 돈을 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쩌자고 이리도 칠칠한 것인지. 문을 두드렸더니 건물 옆쪽 비상문으로 사람이 나왔고, 전후 설명을 마친 후  드디어 그 수표가 손에 들어왔다. 화병으로 앓아눕지 않고 새해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은행을 나와 다시 길을 걸으며 나의 다행을 기뻐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었다. 옷 구경을 할 때 나는 멀쩡했다가 없는 걸 알고는 까무러치듯 놀라서 이 난리를 떨었다.  만약 버린 사실을 계속 몰랐다면 내내 평화로웠겠지. 수표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도 마음은 천지 차이였던 것이다. 수표가 없어도 가방 안에 있다고 믿었을 때는 마음 편했다면, 내게 중요한 것은 '있고 없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다. 말하자면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객관적 사실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오늘 여러 은행을 쫓아다녔지만 그 수표와 만 원짜리 장과 동전 몇 개를 빼고는 모두 종이에 찍힌 숫자만 보았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돈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모두 통장 위의 숫자로만 존재했다. 


그럼 그 숫자들이 있다고 믿기만 하면 그렇게 마음만 고쳐먹는다면 나는 부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어차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당장 쓰지도 않을 거라면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닌가. 수십 억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일은 법에 위배되지도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도 않는다. 그렇게 따지자면, 숫자만으로 확인 가능한 돈을 모으려고 악착을 떨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실제가 어떠하든, 내가 믿는다면 그 주관적 진실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가능할 테다. 가방 수표도 은행 통장 위의 숫자도, 원효대사의 해골물도 모파상의 목걸이도 사실보다는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한 일이었다. 내 통장의 숫자에 동그라미 몇 개를 슬쩍 붙여본다.


눈이 올 듯 찌푸린 하늘이 어느샌가 검푸른 어둠을 입었고, 차들로 꽉 막힌 길은 뚫릴 기미가 안 보였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리도 분주히 돌아다니는 걸까, 그들도 나처럼 숫자 몇 개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까.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믿고 평화를 얻는다면 행복할 텐데. 


계속 길을 걸었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었지만 겨울바람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지하철역이 멀게만 느껴졌다. 내 손이 적당히 따뜻하고 얼굴도 차갑지 않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시리고 추웠다. 인간의 감각이란, 머릿속 믿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 같았다. 생각으로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평화와 행복이 다시 멀어지려 했다.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진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그렇게 하루가 한 해가 저물어갔다. 

                                                                                               (어느 해의 마지막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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