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언더커버 미스홍>을 보다가
며칠전 드라마 <언더커버 미스홍> 을 볼 때였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이 다함께 락카페에 가려할 때 미숙씨가 눈치를 보며 "이번 주 성경공부를 다 못해서 먼저 귀가하고 싶은데요." 라 하자 왕언니(그래봤자 29세)는 세상 다 살아봤다는듯 눈을 아래로 깔고 나직히 한마디를 던진다.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젊음은 다시 오지 않아~"
그저 웃자고 본 드라마였는데. 촌철살인이랄까. 이 말이 마음에 훅, 꽂혔다.
드라마 <언더커버 미스홍>(30대 엘리트 증권감독관 홍금보가 수상한 자금의 흐름이 포착된 증권사에 스무살 사원 홍장미로 위장취업하며 벌어지는 좌충우돌 레트로 코미디.)은 1990년대 세기말, 정확히 말하자면 1997년이 그 배경이다. 누군가에겐 호랑이 담배 먹을 적의 레트로겠지만 내겐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시기기도 하다. 왕언니는 힘줘서 말했다. 30살만 돼도 입장불가니 더 나이먹기 전에 꼭 가봐야한다고. 지금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시절엔 30이면 인생 끝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여자는 스물일곱만 돼도 결혼 못한 노처녀란 딱지를 붙이고 폐물 취급을 했으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절. 작문 수업시간이었다. 그 날도 하나의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고 글을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었는데, 지영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선생님, 락카페 가보셨어요?" "얘들아, 너네는 가봤어?"
설마, 내가 그럴 리가. 그 시절의 나는 드라마 속 미숙씨였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거나 혹은 열심히 다니지는 못해도 교회문화가 뼈속 깊이 뿌리내린 사람. 종교적인 면은 잘 모르겠지만 다른 학생들도 나와 비슷했다. 성실하다, 건실하다, 참하다, 한편 답답하다. 뭐 이런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부류라 할까. 내 과목은 대학부설 기관에 개설된 작문클래스.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섞여 있었는데 따로 수업료를 내야 들을 수 있다. 전공 외에 작문까지 챙겨듣는 이들인 만큼 공부에 진심일 확률이 높았다. 무용과 정원이를 제외하곤 모두에게 락카페는 그저 풍문이었다.
들어보긴 했는데 못 가봤어. 궁금해. 뭐하는 거야. 그냥 춤추고 맥주 좀 마셔. 놀면 된대......
이런 얘기들이 오가더니
"선생님, 락카페. 홍대 앞에 유명한 거 있어요. 우리 다같이 가요!!"
갑작스런 제안인지 선동인지에 당황한 얼굴, 벙친 얼굴, 황당한 얼굴, 신기해하는 얼굴. 우리의 교실에 다양한 표정이 생겼다. 이선생님(다른 대학에 출강하는 선배님이셨다.)이 왕언니로서 결론을 지었다.
"젊었을 때 가야지. 더 나이 들면 가고 싶어도 못 가. 얘들아, 공부랑 글은 늙어서도 할 수 있잖아.
안 그래요, 선생님? 선생님도 곧 늙어요......"
드라마속 왕언니가 말한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젊음은 다시 오지 않아~" 딱 그 말이었다.
이후에는 정원이가 나섰다. 춤을 못 춘다는 말에는 '이렇게 이렇게' 라면서 시범을 보였다. 정원이는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대학원생. 한국무용 전공이었지만 역시 움직임이 달랐다. 갑자기 우리의 작문 수업에 히팝댄스가 섞여 들어왔다. 날짜를 잡고 드레스코드를 정리하고. 그래, 락카페! 방구석에서 글만 쓰지 말고 세상을 봐야지. 우리는 X세대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자며 큰 결단을 한 것이었다.
금요일 저녁. 우리는 홍대 앞에서 만났다. 주로 검은색, 회색 상의에 블랙, 블루 진을 입었고 메탈계열의 악세서리를 한 아이도 있었다. 이선생님이 빠졌으니 나는 그 그룹의 최대 연장자였다. 20대긴 했지만 24,5살이면 시집을 가고 26이 넘으면 늙었다고 취급하던 시대였으니 대학생이 수두룩 빽빽한 이곳에서 락카페의 문을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긴장이 됐다. 나만 혼자 빠꾸 맞고 집에 가는 건 모양 빠지잖아.
그곳에서 아이들은 날 언니라 불렀다. 좀 생뚱맞기는 했지만 그들과의 나이 차이는 6,7살 정도. 심지어 정원이는 겨우 1살 차이였고 우리는 모두 동문이었니 그 말도 틀리지 않았다. 젊음을 상징한다는 락카페에서, 팔을 들고 머리를 흔들고 스텝을 맞추는 그들 속에서 엉거주춤 서투른 손짓 발짓을 하대며 그들과 합을 맞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알았다. 맥주은 컵 없이, 뚜껑 따고 바로 입에 가져가는 젊은 음료라는 것을. 모두가 어찌나 활발하던지 과연 처음 온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교실에서는 보지 못했던 열기가 느껴졌다. 저런 뜨거움을 가지고 어찌 교실에 그리도 얌전히 앉아 있었을까. 나의 학생이자 후배인 그들은 내게 큰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았다. 신나게 흔들어봐. 인생은 이렇게 즐겁게 사는 거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눈에 스치는 장면. 그 무엇을 대할 때도 그것 하나에만 그치는 일이 적다. 환상처럼 수면을 퍼져가는 파문처럼 생각과 기억이 꼬리를 문다. 미스홍의 락카페 회합은 내 젊은 날의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고, 나는 그렇게 그들을 잠시 그리워했다. 다들 예뻤고, 다들 고마웠어. 어디서든 잘 지내~~.
다시 오지 않을 내 젊음에 대한 인사이기도 했다.
드라마 <언더커버 미스홍>을 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