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24일. 그러니까 딱 한 달 전이다. 춥다고 집에서만 웅크리고 있다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서 외출을 시도한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나가다 앱에서 환율을 체크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1500원을 향해 고공행진을 하던 달러가 갑자기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가워서 얼른 1470원에 천 달러를 샀다. 그간의 흐름 혹은 나의 뇌피셜에 의지해 보자면 그 곡선을 분명 위로 향해 고개를 들 것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여의도 더 현대'를 향했다. 그날의 행선지는 알폰스 무하 전시회. 크리스마켓이 사람들로 바글거린다는 뉴스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직 11시도 되지 않았는데 백화점 지하매장은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특히나 케이크를 사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 긴~~ 줄들.
우리가 언제부터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었나??
1990년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선생님은 말했다. "일본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꼭 케이크를 먹어요. 미리 예약도 해놓고요." 자기네 나라 풍습도 아니고 성탄절이 휴일도 아닌 나라인데, 참 신기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2000년대 일본에서 맞게 된 신혼시절, 나도 성탄절에 생크림과 딸기를 얹은 크리스마스케이크를 먹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밀키트를 사다 내손으로 생크림을 한 겹 한 겹 바르면서 설렘을 담아 만든 '크리스마스케-키'. 신기한 일본 사람들의 대열에 자연스레 합류한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 번에 한 가지만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눈앞의 풍경을 보면서 머릿속은 동시에 과거 기억을 끄집어내고, 얼기설기 실끝을 얽어가며 또 하나의 일상을 만들어내는데. 오늘 나의 추억에 끼어든 또 하나의 생각. 그것은 환율이었다.
달러가 어떻게 됐을까. 6층 무하의 전시장을 향하면서 앱을 들여다보니, 뭐지? 더 떨어졌네? 지구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뉴스를 살펴도 특이한 점이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지구상에 평화가 찾아왔을까. 그동안 환율의 압박에 시달린 이를 위해 선물을 주려는 것일까. 오래전, 롯데백화점이었다. 가을 신상 아이보리 가죽 코트를 보곤 한눈에 반했으나 가격이 너무 사악해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다가 크리스마스 아침에 가서 1/3 가격으로 득템을 했다. 점원은 분명히 말했다. 크리스마스 특별세일!이에요~
달러도 그런 것일까. 또다시 천 달러. 나는 분명 벌이가 없으신 아주머니지만 호기롭게 질렀다. 산타는 아니지만 산타와 비슷한 무엇인가가 나의 행운을 돕는 듯했다.
알폰스 무하의 전시회장은 백화점에 있느니 만큼 사이즈가 크지는 않았다. 아르누보의 거장이라는 그의 작품 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예뻤다. 반짝이는 금빛 옷을 입고 꽃장식을 하고 우주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을 한 그녀들. 그리스 여신의 현대판이었다. 그녀들이 등극한 연극 포스터, 입간판, 과자와 와인의 포장지라면 나라도 당장 지갑을 열겠다. 그림을 보다가 앱 속 달러의 동향을 살피다 또 떨어진 매력적인 가격에 손을 댔다. 오백? 천? 일단 지르자.
무하의 섹션은 파리 시대를 지나, 좀 생소했지만 체코의 민족운동을 담은 판화, 그림으로 넘어가 있었다. 앞서 보았던 환상적인 미모의 그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비사실적인 느낌이기도 했다. 솔직히, 나 사는 세상도 치열하고 힘든데 이미 지난 세기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 민족주의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있을까. 이쁜 거 보면서 마음에 평온을 얻고자 간 전시회였으니 속의미 말고 그냥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심취하자 생각했다. 찌글찌글한 주름 잡힌 얼굴에 피를 찔찔 흘리며 투쟁하는 사실성보다는 그 편이 내게 평화와 위안이 될 테니.(체코의 국보급인 작품 앞에서 이런 무식한 발언을 해서 죄송합니다!)
밥을 먹으려면 웨이팅리스트를 작성해야 한단다. 주변 벤치에 앉아 커피와 빵으로 간식인지 식사인지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식당에서 풍겨오는 음식냄새, 카페의 커피향, 그리고 발아래로 보이는 5층 크리스마켓의 이쁜 집들과 초록 트리와 반짝임은 평화와 행복 그 자체였다. 알폰스 무하가 연이어 펼쳐지는 듯했고, 벤치에 앉아 나는 평화롭게 또 천 달러를 샀다. 아까보다는 떨어졌지만 다시 오르겠지, 그렇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했다. 그날밤, 떨어지는 환율을 보면서도 더 못 산 것을 아쉬워했다. 이미 나의 수익률은 파란불 마이너스였지만 괜찮았다. 그간의 흐름을 보자면 달러는 금세 오를 것이니까.
도박은커녕 화투도 못한 내가 이런 도박 같은 마음을 갖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 9월이었다. 이사를 준비한다고 모아두었던 달러와 엔을 내다팔았다. 과거 외국생활을 오래 했으니 그때 생긴 외화도 있었고 다른 재테크는 하지 않지만 우리 집엔 비상금처럼 항상 일정 비율의 외화가 있었다. 예적금뿐과 그것들을 톡톡 털어서 계약금을 마련했다. 달러를 1370인가에 팔면서도 흐뭇했다. 곧 큰 집이 생길 것이었으니 환율도 달러를 묵혀둔 세월도 아까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며칠 후 계약이 엎어졌고, 그러다 가을이 지나가는 사이 외화가 얄금얄금 오르더니 폭등 수준이 됐다. 내 손에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집도 돈도 다 날렸다. 상실감이 몰려왔고 비싸지기만 하는 달러 앞에서 망설이다 한두 달을 지내고 보니, 이번이야말로 기회다 싶었다. (이런 걸 두고 근자감이라 할까.)
하지만 연말께에는 달러가 더 떨어졌고 내 계좌는 더 무게감 있는 파란색 숫자를 내보였다. 행운이 여신이 나를 찾아오기는 개뿔. 나의 불안은 시간을 기다릴 인내심을 쫓아버렸고, 결국 더 떨어지는 비참한 상황을 대면하지 않기 위해 25년이 가기 전에 서둘러 달러에 이별을 고했다. 얼마를 밑졌으려나. 망상은 하지 말자고, 돈벌이가 그리 쉽냐고, 왜 행운이 여신이 너를 편애하겠냐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라고 나를 다그쳤면서. 기대와 평화와 좌절과 체념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내게 허락된 것과 허락되지 않은 것들에 관해 잘 알게 된 며칠이었다.
새해가 되기 전에 이렇듯 외화를 정리했으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게 다일까. 자고깨면 코스피가 4000, 5000을 달린다며 날마다 들썩이고 환율도 날마다 올라가는 이 나라에서 잠자코 예적금을 하고 있는 나는 벼락거지란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자꾸만 환율을 기웃거렸고, 틈나면 삼전과 하이닉스에 눈을 돌렸다가 겁나는 마음에 뒷걸음쳤다. 머뭇거리기만 하는 멍청이! 라고 욕하다가 하지도 못할 일에 쏟아붓는 내 시간이 아까워졌다. 그게 다 모여 내 인생인데, 돈 몇푼 버는 것보다도 시간이 소중할 텐데... 간이 작은 내게 투자란 어울리는 짓이 아니다. 그러다 명을 재촉할 수도 있으니 한눈팔이는 그만!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일, 평화와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일에 힘을 쓰자.....
___ 여기까지가 엊저녁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제법 잘 실천한 듯 환율도 주식도 안 찾아보고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토스 앱에서 1459원에 ****달러가 환전되었습니다.
알람이 울렸다. 계속 올라가는 환율에 놀라 지정금액을 설정해 두었는데, 지우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앱을 켜보니 1459원에 환전해 놓고 달러는 또 떨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이꼴을 안 보려나. 이걸 안 밑지려면 또 며칠은 앱을 들여다봐야할 것 같다. 환율 따위는 신경 안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시 도돌이표. 그냥 손절하고 내 시간을 아껴?
젠장! 내가 사면 떨어지는 마법. 언제까지 이 체험을 할 것인가. 마음이 갈팡질팡 오락가락. 머리가 지끈지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