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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Mar 31. 2020

88. 정말 '양극화' 됐을까?

공론장에서 사회 현안을 함께 토론하고 행동하는 '공중'은 무비판적인 태도로 특정 사상 또는 정치지도자를 추종하는 '군중'과는 다르다, 고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는 말했다. 지금 여기, 후자에 해당한다고 보이는 사람들은 일명 '문빠', '태극기 부대'일 것이다. 어떤 집단을 이렇게 멸시적으로 언어화하는 것에 동의하진 않는다. 물론 개인을 개인으로 구별 짓게 하는 요소들 예컨대 연령대, 성별, 직업, 외모 등이 집단화가 되는 순간 자취를 감춰버려고, 그 개인들은 '덩어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건 알고 있다. 그 덩어리를 명명할 때, 소속원들 이름을 다 이어 붙여 부를 수는 없으니 쉽게 묶어 표현하는 건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이름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용하는 건 내부 사람들에겐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네이밍 된 집단 내부는 외부의 압력에 더 단결하겠지만 말이다. 그게 지금 두 집단의 끈끈한 유대와 특정 인물을 향한 충성 동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두 집단은 작년에 서초동과 광화문에 나왔고, 대부분 언론이 묘사한 '양극화된 대한민국 사회의 상징'처럼 비쳤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정말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양극화됐다고, 상대를 향한 적의로 극한 대치를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아주 좁은 렌즈로, 줌인을 하고 또 해서 대한민국 사회를 묘사하고 여론이라 칭해버린 게 아닌가. '축소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진보와 보수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고, 특정 정치성향을 갖고 있대도 구체적인 사안에 의견이 다를 수 있으며 그 내용과 찬반 정도 등을 사람 숫자별로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퉁쳐도 됐었나 싶다.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프레임이 아니었을지. 광장 밖에 있었고, 현장을 떠나 있던 내가 모르고 하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시민으로서 문빠와 태극기 부대, 양극화 이 세 단어로 쓰이고 또 쓰인 기사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피로감과 정치 무력감만은 생생하다. 그렇게 특정 집단도, 그 집단이 자아내는 풍경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소수일지라도 집단 내의 별종 또는 집단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개인을 없는 존재로, 또는 그다지 해석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치부해버렸다는 뜻이 아닐까. 그게 누군가에겐 용이할 테니까.  


# 놀러와요, 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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