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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Apr 05. 2020

93. 비상구와 선거공보

문이 안 열렸다. 비상구문이었다. 비상시를 위해 잠그지도, 짐을 두지도 말라고 분명 적혀있었는데 왜 안 열리지 싶었다. 저층에 살아서 가끔 급하면 비상구를 이용하던 나는 이사 오고 처음 맞는 상황에 잠깐 당황스러웠다. 일단은 다시 계단을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왔다. 궁금한 마음에 비상구로 가봤더니 문을 가로막는 커다란 짐 따윈 없었다. 그저 문 바로 앞 우편함에 가득 채워진 선거공보물 때문에 문이 안 열렸던 거였다. 그 두께와 개수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겠구나 싶었다.


그 선거공보를 챙겨 방에 돌아왔다. 하나씩 살펴보는 데 주말 예능이 따로 필요 없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기엔 혹시나 법적 문제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다만 이런 공약과 이따위 후보자 소개 문구가 가능하다니 신기할 정도. 헛웃음이 났다가 그럼에도 이들이 발언 권력을 갖고 있단 사실과 당선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쓴웃음을 지었다. 안 열리던 비상구처럼 우리 사회가 나아가는 데도 진보를 막아서는 것들이 그 선거공보에 가득 담겨 있었다. 또 다른 비상구가 없으니 조금씩이라도 문을 밀어 결국 열어야 할 텐데. 회피하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문을 가로막던 게 무엇인지 외면한 채 살진 않아야 할 텐데 싶다.


# 놀러와요, 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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