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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Apr 10. 2020

96. 괴물

영화 <박화영>

두 주인공의 뒷모습은 닮았다. 그 뒷모습이 혼자 남겨진 채 생이 버거운 청소년의 것이란 점에서다. 영화 <영주>와 <박화영>의 주인공들 얘기다. 그들이 이른 새벽 대교 위를 걷든, 골목길을 걷든 장소는 중요치 않다. 그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버려지고 소외된 채로. '영주'는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어린 장녀이고, '박화영'은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무시받고 이용당하는 비행청소년이다. 이 두 영화가 영주와 박화영의 느리고 힘 빠진 뒷모습을 오래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동시간대에도 그렇게 걷거나 걸을 아이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임을 감독들은 말하려 하는 듯했다. 내 상상이지만 "이렇게 지켜만 볼꺼야?"라고 말이 더해졌을지도. 그 뒷모습을 화면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거웠던 마음의 크기가 더, 더, 더 가중돼서 그 아릿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어제 봤던 영화 <박화영>의 여운은 더 컸다. 채도로 치면 두 영화 다 어둡지만 <영주>는 무겁게 어둡고, <박화영>은 어두운데 아주 강렬하다. 박화영은 부모도 친구도 없다. 물리적으로 없다는 게 아니다. 부모는 가정이란 울타리를 쳐주지 않고, 친구는 어른의 세계를 답습한 권력 구조 속에서 서로를 이용하고 물들일 뿐이다. 중학교 시절, 소년원을 다녀오고 강제전학을 당해 우리 학교에 왔다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녀와 박화영은 닮아있었다. 패륜적인 언사부터 일진 세계에 깊이 발들였다는 사실까지.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가졌던 불편한 감정의 이유를 찾았다. 사실은 영화가 한 번쯤 목격했거나 경험했던 이야기를, 하지만 지금 내 안전한 세계와 너무나 달라서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거의 그 친구를, 박화영과 같은 아이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로 돌아간대도 나는 그 친구와 어울리지 않겠지만, 나는 지금 어른이다. 어린 아이들을 돌봐줘야 할 의무가 있는 어른. 영화를 보고서 생각이 많아진 이유였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존재가 아니다. 표준과 평균, 규범에서 벗어났거나 밀려났다는 이유로 이 청소년들은 타자화된다. 불쌍한 애가 되거나 못된 것만 배운 애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 불쌍하던 애가 부모의 방치 아래 또래집단에 휘둘려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괴물'이 된다. 어리고 안타까우니까 범죄에 면죄부를 주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 아이들의 행위를 어떻게 교정하고 예방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 논의, 그간 논란이 됐던 개별적 사건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누가 그 괴물을 만드는 지도 생각해보는 것은 돌고 돌아 괴물의 등장을 어떻게 막고 또 그 괴물을 다룰 것인가와도 연결돼 있다. 누가 방치하고 물들였는가, 그렇게 규정짓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선인가, 선악을 떠나 유용성을 고려해도 괴물이 된 이들을 가둬버리면 공포와 분노는 사라지는가 하는 것들 말이다. 책 <데미안>의 싱클레어에게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부모가 만든 안전한 세계, 다른 하나는 집 밖의 세계. 전자를 품고 후자로 나온 우리들의 시각에선 그 아이들이 무섭겠지만, 그 뒷모습을 가진 아이들에겐 자신의 삶과 괴리된, 자신은 방치한 채 너무나 잘 살아가는 이 세상이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 놀러와요, 글-놀이터!

https://room-alo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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