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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Apr 13. 2020

99. 홈런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여기 '대기만성형'이라 자부하지만 실은 '대기'하고만 있다는 비아냥을 듣는 사내가 있다. 이 사내 이름은 료타. 소설가가 되겠다면서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고 있다. 글은 안 쓴다. 돈 떨어지면 노모 집을 뒤지고, 누나를 찾아가 양육비를 꾸는 그는 가족들에게 인순이의 노래 가사처럼 말한다. 난, 난, 꿈이 있어요,라고. 그러니까 노모와 누나는 말한 것이다. 대기하고만 있다고, 현실에 발을 딛지는 않고 말이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얘기다. 


료타의 아들 싱고는 홈런을 안 친다. 싱고가 못 친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게, 필드에서 방망이를 아예 휘두르지 않기 때문이다. 볼넷으로 1루 진출하기 위해서다. 싱고의 꿈은 공무원. 야구 선수가 될 재능은 없다고 이미 판단했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는 료타의 질문에 싱고는 말한다. 안 해봐도 안다고. 방망이를 처음부터 휘두르지 않듯이 싱고는 시도하기보다 안정적인 선택을 한다. 그러면 볼넷이라도 하니까. 


그런 싱고가 태풍 속으로 뛰어드는 과감함을 보일 때가 있다. 료타가 낮에 사준 복권을 찾기 위해서다. 이 부자에게 복권은 매일 쓰지 않아도 만들어질 소설과 휘두르지 않아도 칠 홈런과도 같다. 공허한 꿈인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이 영화는 끝이 난다. 오픈 엔딩이다. 그들의 경우와 달리 꿈이란 단어가 낭만적으로 빛나는 사례도 있다. 배우 이정은 얘기다. 한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후배들에게 말했다. 꿈의 첫 느낌을 간직하고 계속하다 보면 기회가 반드시 온다고. 


20대부터 연극을 했고, 40대에 TV 방송에 나오기 시작한 그녀는 지금 "온 우주의 기운이 그녀에게 몰린다"는 말을 주변 동료로부터 듣는다. 이정은의 꿈이 이뤄진 것은 방망이를 계속 휘둘렀기 때문이다. 꿈을 찾는 일조차도 사실은 행운임을 안다. 그러나, 찾은 길을 좇는 것도 의지와 능력의 영역. 태풍처럼 예기치 못한 재난인 코로나 19 사태 앞에서 우리 모두 억지로 대기하게 됐다 해도 그 자리에 서서 방망이는 휘두르고 있기를. 언젠가 공이 날아오고 실제 경기가 시작되면 땅! 청량하게 울리는 그 소리를 듣자.


# 놀러와요, 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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