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민희 Dec 30. 2019

4. 캐리어

영화 <레이디버드>의 캐리어와 작가 김영하가 말하는 '추구의 플롯'

겨울 코트 두 벌, 목 티 네 개, 수건 세 장, 헤어 드라이기, 세안 용품... 보라색 캐리어를 가득 채운 내 생필품. 오른손에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서 이대역 3번 출구 앞에 섰다. 숨을 헐떡였다. 캐리어를 들고서 계단을 오른 후였다. 이화여대 정문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고시텔까진 5분을 더 걸어가야 했다.


꽉 차 터질 것 같은 백팩이 어깨를 짓누르고, 왼손엔 엄마가 싸준 반찬이 들려있었다. 숨 한번 들이쉬고, 어깨 한번 으쓱이고서 나는 학생들과 관광객 사이를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그 날은 2019년 1월 4일. 내가 서울에 온 날이었다. 인턴'때문이' 아니라 인턴을 '빌미로' 온 날. 크고 넓은 만큼 내게 다양한 사람과 기회를 마주할 기회를 줄 것으로 상상한 세상에.


영화 '레이디버드'의 주인공은 고향 새크라멘토가 아닌 뉴욕을 갈망해온 크리스틴 레이디버드 맥퍼슨. '드디어' 뉴욕시의 한 대학교 입학생이 된 그녀가 혼자 지하철에서 낑낑대며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장면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봤다.


이 성장영화가 '끝이자 시작'이라는 감독 그레타 거윅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고 자란 고향에서의 삶이 레이디버드 생의 한 페이지였다면 이제 새로운 곳에서의 일상이 다른 페이지이므로.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2평짜리 205호 방에서의 일상은 때로 평온했으나 점차 버거워졌다. 그때의 나는 농도가 짙어질수록 물속 깊이 가라앉는 농축액 같았다. 물이라는 시간을 채우는 일들이 성취가 아닌 실수와 실패가 돼가면서였다.


20대의 실패는 시행착오에 불과하다지만 당시 내게 그건 말장난이었고,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엔 그만 사겠다고 혼자 아우성쳤다. 캐리어의 양쪽을 다 펼칠 수도 없는 방에서도 굳게 다잡았던 초심이 옅어지고 있었다.  


작가 김영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는 '추구의 플롯'이란 표현이 나온다. 김영하는 이 플롯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주인공이 외면적 목표 추구엔 실패해도 그 과정에서 내면의 목표를 찾을 때 이 삶을 더 응원한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내 이야기의 플롯이야말로 추구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올해 특정한 직업을 갖는 것이 내 외면적 목표였다면 내면적 목표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내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의 문제였다.


따뜻하고 깊은 사람이 되고 싶은, 그리하여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고 싶다는 꿈. 그 시절 내가 내면의 어두운 혼란 속을 걸을 때 느끼고 얻었던 모든 배움은 아주 잘고, 얇지만 그 목표를 향한 조각들이 됐다.


적어도 처음 캐리어를 끌었던 그때의 나보다 지금 나는 좀 더 안으론 강하고 밖으론 다정한 사람이 됐다. 그것으로도 지나간 시간들이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 놀러와요, 글-놀이터!

https://room-alone.tistory.com/ 


작가의 이전글 3. 안전장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