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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Dec 31. 2019

5. 여행을 갈망하지 않는 이유

백팩에 잠옷, 양말, 세면도구에 노트 한 권과 필통을 챙기고서 훌쩍 제주로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게 여행이 절실히 필요했다. 영어학원을 아주 열심히 다니던 때였는데, 매일 회화와 글쓰기 실력에 있어 남들과 비교되는 게 지쳤다. 영상을 찍어 카페에 올리고,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하고, 글을 돌려 읽고 함께 스터디를 하면서 타인의 실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숙사에 살았으니 눈 뜨고 감을 때까지 함께였으니 오죽했겠나. 공부한 지 1년 반이 지나던 때쯤 나는 제주로 갔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2박 3일간 올레길을 걸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어나 조식을 먹고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경로를 따라 미리 근처에 잡아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씻고 책 읽고 일기 쓰다 잤다. 떠나온 일은 매일 내 몸을 바쁘게 만들던 수업, 숙제 그보다 마음을 고되게 하던 압박감, 불안감, 관계에의 피로 등으로부터 날 가벼이 만들었다. 제주에선 내가 머문 어떤 곳에도 지속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하고,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됐다. 난 그저 하루 머무는 손님이자 자연에 크게 유해하진 않은 존재였다. 


당시 여행의 구체적인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날 괴롭히던 잡생각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보자는 것. 서랍에 옷을 넣듯이. 그러나 매일 걷고 또 걷다 보니 깨달은 것은 생각은 정리하는 게 아니라 비워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더불어 여행지는 삶의 현장이 될 수 없다는 것. 땅에 발 붙이고서 흙과 모래, 아스팔트 위를 한없이 걸어도 나는 안정감을 느끼진 못했다. 떠나왔으므로. 그래서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조약돌처럼 잡생각들을 길 위에 하나씩 떨어뜨려놓았다. 길 위에 버려두고 난 돌아가기 위해서.


이젠 예전만큼 여행을 갈망하지도, 즐기지도 않는다. 그 이유를 작가 김영하의 에세이에서 찾았다. 그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을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라고 했다. 집이란 안식처인 동시에 '상처 쇼윈도'와 같기 때문에. 나는 제주로 떠났던, 또 떠남을 계속 원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 혼자 산다. 기숙사에도, 부모님 집에도 살지 않으므로 그곳에 내가 그들과 주고받은 상처의 기억들이 지금 내 방에는 없다. 오히려 이 방은 내게 동굴과 같은 곳. 바깥에서 아무리 스스로가 취약해졌어도 여기 안에서만큼은 안전하다는. 그래서 여행을 떠나 기억으로부터 달아나거나 새하얀 호텔 침대 위 기억을 리셋하기보다는 내 방구석구석 내 흔적들을 돌아보며 차분히 생각하고, 마음을 채우는 일이 더 좋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 가방을 메고 근교 도시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곤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20대가 돼서도 우리나라 여러 도시뿐 아니라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을 여행하곤 했죠. 제주는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라 부를 만큼 항상 가고 싶어 했던 여행지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요즘엔 여행을 예전만큼 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다 이 글을 썼습니다.


# 놀러와요, 글-놀이터!

https://room-alo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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