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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Jan 19. 2020

24. 내가 미워하는 것

사람일까, 시간일까

어제의 나는 나의 '미운 사람 목록'에 한 명 추가했다. 직장 선배 A다. 그는 퇴근 전 내게 몹시 짜증이 난 듯한 말투와 제스처를 아무런 절제 없이 보였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존댓말로 대답하던 나는, 왜 그는 내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지 궁금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여러 번 그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맘껏 그에게 맞대거리를 하고 비웃고 망신을 줬다. 어리석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그 칼날이 사실은 나를 향해있고 날 상처 입힐 거란 걸 알면서도 그랬으므로. 미움은 내 조용하고 작은 동굴, 206호에 들어온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용서란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과거에 매달려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결코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라.

그리고서 펼친 책에 이 구절이 있었다. 이해했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내 '미운 사람 목록' 속의 인물들을 한 명도 용서하지 못했다.


전 남자 친구를 생각다. 무심했던 그와 사귀는 동안 내가 살았던 고시텔에서의 외로움, 무수한 탈락의 아픔이 묶여 떠오른다. 오빠를 떠올리면 그가 내게 휘둘렀거나, 또는 그와 함께 우리가 겪었던 가정폭력의 상처가 아린다. 모든 것이 그의, 오빠 탓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때의 시간을 나와 함께 관통했던 이들이기에 그들을 떼어놓고 온전히 당시를 기억하긴 어려웠다.


문득 생각했다.

내가 더이상 용서하지 못한 건, 그들이었을까.


어쩌면 '그 시간들'었을까.

'때로 외롭고 자주 괴로웠던' 지난 나의 과거를  추억할 수 없어서 나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이 아닌, 그 시간 속을 동행했던 이들을 미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 시간을 미움이 아닌 기억으로만 남겨두기로 한다.


# 놀러와요, 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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