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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Mar 11. 2020

69. 미화될 기억

누구에게나 미화되지 않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기 마련인데, 고집스럽게도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들에 가기가 꺼려진다. 일이 있어 불가피하게 그곳에 가게 되면 향수에 취해 감상하기보다 서둘러 그곳을 도망치고 싶기도 하다. 내게 이화여대 앞이 그랬다. 


지난 한 해 나는 이대 앞 고시텔에 살며 수없이 주변을 거닐었고, 학교 개방 공간에선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앉아 공부를 했다. 취업준비를 위해서였다. 봄여름을 오롯이 보내고 가을의 문턱에서야 나는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는 돌아왔다. 코로나 19 사태로 공립도서관들이 문을 닫으면서 공부할 곳을 찾기 어려웠다. 예전부터 공부해 온 곳이라 초심을 다잡을 겸 이대로 온 것이다. 돌아보니 곳곳에 기억이 묻어났다. 


2평짜리 방이 너무 답답해 뛰던 캠퍼스 운동장, 취업을 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늦은 밤 거닐었던 기숙사 근처 산책길, 면접 준비를 위해 혼자 웅얼거리며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했던 학교 복도까지. 


그때의 나는 외로웠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무의미한 만남에서 오는 값싼 위로나 시간 때우기와 바꾸지 않았다. 대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일기를 썼다. 홀로인 시간에 성장해 아끼는 이들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지금 내 곁에는 친구 한 명이 있다. 나와 생활 스터디를 같이 한다. 우린 정해진 시간에 만나 각자 공부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 그뿐이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일 때면 나는 혼자였던 과거를 떠올라 자주 감사함을 느낀다. 


오늘 저녁엔 학교 운동장을 함께 걸었다. 한 번도 누군가가 동행하지 않았던 그 길 위에 나는 그녀와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제 이 곳에 대한 내 기억은 대체될 것이다. 함께함으로써 충만한 기억들로. 그렇게 이 곳에 대한 내 기억이 미화되길 바란다.  


# 놀러와요, 글-놀이터!

https://room-alo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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