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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an 02. 2019

고도를 기다리는 시지프스 1

신음하던 짐승에서 말하는 인간으로


12월 29일이라는 날짜. 잊으려야 잊히지 않는 일년 전 그 시간이 다가오자 가슴은 불방망이가 뛰고 호흡이 가빠왔다. 잘 견딘다고 잘 해내고 있다고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급기야 온 몸이 경직되기 시작하더니 잦아들던 무릎 통증이 극심해져서 통나무로 뻣뻣해지며 들어 올리지 않고는 옮기질 못한다. 


생전 낮잠을 자는 법이 없는 내가 멀미를 하듯 그냥 침대위에 웅크리고 누워 깜빡 쓰러져 있었다. 으슬해지는 한기에 깨어났다. 노을이 나리는 창밖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절로 물기가 서렸다. 강한 충격이나 심리적 요인때문에 신체화장애가 나타나는 사례들이 있댔지. 아니 있었다. 내게 상담을 해오던 많은 이들에게서도 발견되던 증후군이었지. 쉽게 전문용어을 들이밀며 그들에게 위안으로 내밀던 카드를 내게 적용하게 될 줄은 .스멀스멀 자기 혐오가 다시 기어올라와 나를 형편없이 패대기 치려 한다. 이건 아니지,이건 아니지.안간 힘으로 터널을 빠져 나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는 안된다.안된다.안된다.


나란 인간은 참 멀쩡해보였다,겉으로는. 집밖 세상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던 어느 날부터 뭔가를 늘 분주하게 하고 있었고,어딘가로 뽈뽈대고 다녔다. 목적이 있을 리 없고 그저 매일 할 일이 있고 만날 친구들이 있고 읽을 책,들을 음악,볼 그림들이 그득해서 아니 심심한 일조차 재미나서 잠자는 시간이 아까웠다. 늘 어디엔가 속해 있으려 했고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 한편,자주 외로웠고 쓸쓸했다. 서럽기도 잘해서 곧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어려선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서 둘이 집에 있게 되는 상황이 너무 두려웠다. 그런 미움,그런 불안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단박에 철이 나버렸다. 내가 거꾸로 아버지란 존재,어머니란 성채,오빠라는 존엄,언니라는 모순들을 껴안으며 내 안에 두 개의 세계를 분리해서 부렸다. 


비밀 주머니를 찬 이들의 정체성은 늘 혼란 그 자체다. 자신의 이름을 떳떳이 할 수 없는, 위축감이란 과다한 방어의식을 불러오곤 했다. 자연히 긴장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쉬이 피로했으며 무리진 함께에서 종종 자발적 고립을 필요로 했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방황하며 독특한 길을 걸었다. 특별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삼이사 평범함 속에 잘 숨어들기 위해서. 발톱을 숨기고 살자니 신경은 늘 날이 섰는지 모른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에서 평범하기가 제일 어려운 일이란 걸. 알에서 깨어나고픈데 내겐 투명막이 한 겹 드리워  언제나 오리무중이었다. 


더 이상 비참해지기 어려울 일을 겪으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기현상을  잠시는 경험했다. ‘타인’을 통해 존재 이유를 찾고자 했던 기존의 위선적 태도를 벗고,‘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자신에 대한 경계를  다시 세우는 시간을 보냈다. 그제야 진정으로 나처럼 아픈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 지금의 ‘타자’는 이전의 ‘타인’과는 분명 의미가 다름을 알아가던 중이었다. 인간이란 ‘존엄’이라는 가치와 소중함을 타고난 존재라는 통찰을 잊지 않으려 기를 썼다. 여전히 바위덩어리를 지고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시지프스로 살지언정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주는 의미가 고통이지만은 않다고 스스로 주억댔다. ‘나다움’으로 수많은 ‘나다움’의 삶을 사는 이들과의 연대로 세상엔 다시 새로운 길이 난다고 믿었다. 믿었다. 믿었다. 


그런데 다시 주저앉으려 한다. 주저앉으려 한다. 앉으려 한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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