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TE 코칭
[10일차 : LTE(Live for Today, not for Tomorrow & Enjoy!) 코칭]
인터넷 세계가 열렸을 때 내 첫 닉네임이 ‘지금,여기에’였다. 20대부터 내내 추구해온 가치이다. 종종 주의력을 잃고 근심 걱정을 사서 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지금&여기에 만큼 나를 나답게 하는 시간이 없었다. 신에게 범한 인류 보편의 원죄 외에도 나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낙인이 찍힌 원죄가 있는 듯해서, 과거는 언제나 내게 고통이었다. 무감한 척 짐짓 ‘모른다’로 일소했지만 실은 어떻게도 지워지지 않는 화인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으면 단호하게 NO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오래도록 나를 지배해온 의식이었다. 나 개인의 내적으로야 ‘모른다’고 잡아뗄 수 있겠으나 외적 환경 요소들은 곳곳에서 나를 할퀴었다. 잊을 만하면이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 툭툭 불거져 나와 딱지가 앉을 겨를이 없었다.
타인들에 대한 관심을 표하거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가벼운 발화, ‘형제자매는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은 늘 말문을 막았다. 호적에 올라간 내 상태를 설명해야 하는지, 실제 동거인으로 있는 언니, 오빠를 말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서 어물쩡 넘어가거나 그때그때 답이 달라지기도 했다. 야만의 시대는 수시로 ‘네가 누구냐?’를 증명하게 했고, 나는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하건 부연 설명을 끊임없이 붙여야 해서 때때마다 새기듯이 스라렸다. ‘내 잘못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밀려들면 엄마가 원망스러워질까봐 감히 그런 생각조차 구겨 넣었다. 자연히 과거에 머무는 얘기들은 ‘나’라는 존재는 지워지고 언제나 누구의 딸이고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가 드러나서 몸서리쳐지도록 싫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비치고 평가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지금, 여기에’의 오롯한 진실을 추구했다기보다, 내 존재가 지워질까봐 지금 이 자리에서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아직 다른 사람들은 준비가 덜 되어 있어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보다 과거에 운명 지어진 조건항으로서의 나를 궁금해 했다. 나의 도드라진 성씨 ‘육’가가 죽어라 싫었다. 김이박최 였어도 덜 튀고, 묻혀 지내기 좋았으리라. 부적절한 상태에서 하필이면 나만 육가로 태어나서 더더욱 꼬리표를 달기 쉬웠다. 또 그렇게 보수적이고 양반입네 하는 곳에서 홍길동의 운명을 지고 있었으니 운신의 폭이 제한적이고 억압적이었다. 내겐 더없는 폭력이었으나 나는 엄마를 지켜야 했다. 이런 배경을 가진 터, 내게는 과거라는 시간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족쇄’였다. 자연히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보여야했고 내면의 외로움을 나를 이해해줄 만한 사람들을 찾아 헤맸다. 동기야 어떻든 ‘지금 이 순간’의 시간들을 선택했으므로 나는 그래도 비교적 긍정적이고 명랑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삶의 체험으로 터득한 진실들을 꺠닫게 되는 순간까지, 명사형에서는 다소 벗어났는지 모르나 죽어라 Doing의 삶을 살다가 장렬히 전사할 판이었다.
20대 말, 현존의 상태에서 꽤나 의식의 황홀경을 맛본 적도 있었으나, 참 고독한 일이었다. 알아듣고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SEA 환경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이방인 아닌 이방인으로 언제나 경계에서 비틀거렸다. 나는 확실히 오만을 부린 게 맞다. 나는 내 가족들이 다 나보다 약한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그들의 방패가 되겠노라 나를 희생시켰다. 그들의 탁월성을 빼앗았고 나를 소진했다. 이런 배경을 갖고 있으니 내게는 ‘지금, 여기에’의 펄떡이는 순간 말고 ‘예전엔 말야’는 아예 지워버리고 싶은 무엇일 밖에. 여차저차 습관으로 굳혀간 덕분에 내재한 깊은 슬픔을 감추고 또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낼 수 있었다. 셀프 코칭을 거듭할수록 ‘현존’에 머무는 자유로움이 나를 가볍게 날아오르게 한다. 오늘 만난 LTE 급의 현존 코칭을 통해서 나는 또 더 깊은 현존을 경험하게 되었다.
Q1. 10년 뒤에도 후회하지 않을 한 가지 결정을 한다면?
A1. 부모의 책임을 위해서도 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도, 또 내 영향력으로 삶의 비밀을 알아차릴 단 한 명의 사람을 위해서도 나는 코치의 삶을 살겠다.
Q1. 오늘을 살지 못하는 주된 불만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하는가? 그들은 사대의 감정과 의도를 알까?
A1. 오늘을 살지 못하는 주된 불만은 내 몸을 돌보고 관리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가 한 결심을 지켜내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다이어트와 운동의 영역이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가 될 만큼 실천이 어려울까?
Q1. 오늘을 살기 위해서 나는 어떤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면 만족하게 될까?
A1.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면 나를 칭찬해주겠다. 여전히 운동하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신을 질책하고 미리 위축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비난이 무서워서 또 위축되고 운동하겠다는 마음조차 멀리하고 회피하게 된다. 그래서 움직임 자체를 늘여갈 수 있는 동선을 만들겠다.
Q1. 내가 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주의를 모으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내게 없는 것들)
A1. 치명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금전의 문제, 건강한 몸, 게으름 피울 수 있는 시간
Q1. 오늘 내게 있는 것에 주의를 보내기 위해서, 내게 있는 것 3가지에게 감사를 보낸다면?
A1. 나를 돌보고 함께 살고 있는 고마운 아들, 무한정으로 듣고 읽고 볼 수 있는 음악/책/그림, 꽃과 책으로 둘러싸인 카페 ‘꽃, 책으로 피다’
Q1. ‘몰라’ 센터링을 읽고 깨달은 바와 결심한 바를 기록하라.
A1. 회피 수단으로서의 무책임하고도 짜증스러운 말, ‘몰라~’와는 다른 차원의 ‘몰라’ 센터링을 체계적으로 따라 가다 보니, 모른다는 것이 모르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가 경험한 세계 안에서 안다고 생각했던 그것은 극히 일부분이었을 뿐이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건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된 세계가 거대하다는 실감이 온다. 그런데 지금 조금 잘 된다고 우쭐해하거나 혹은 지금 뭔가 풀리지 않는다고 위축이 된다는 것은 한계를 스스로 짓는 행위이다. 무한한 세계를 맛본 적이 없이 극히 좁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내 의식이 어디까지 확장이 되어서 얼마만큼 탁월성을 펼쳐 보일 수 있을지 누구도 모른다. 같은 이치로 내가 만나고 관계 맺는 이들이 얼만큼 위대한 존재인지 그 넓이와 깊이를 감히 잴 수 없다. 오로지 내가 현존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나의 순수한 의도만이 그 스스로 드러나면 나의 삶은 저절로 변화가 올 것이다. 그 변화와 범위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SEA 후원을 통해 의식이 확장되며 자유로워져가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Q1. 판단 없이 5감을 여는 ‘코칭 프레즌스(현존) 연습 총정리를 읽고 깨달은 바와 결심한 바를 기록하라.
A1. 셀프코칭을 기록한지 10일 차, 어디에서건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이 길어진다. PJ 현존연습 = 센터링/마음챙김/코칭이라는 공식을 삶에 들이기 위한 연습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몇 달 전부터 잠자리에 들거나 깰 때 하고 있던 바디스캔을 통해 충분히 쉼을 즐긴다. 편안한 수면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의력을 놓칠 때도 있으나 놓친 순간에도 얼른 알아차리고 관찰에 들어간다. 감정의 흐름을 읽고 세세하게 스스로에게 피드백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나의 셀프코칭일지를 작성하면서 나 스스로를 SEA하고 있으며, 이 실천일기를 보고 있는 한 사람에게는 소리없는 영향력으로 내 의도를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혼자 센터링도, 알아차림이 가능했지만 의도실현은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 SEA 문화의 확산이야말로 내가 오래도록 원하고 꿈꾸던 후원환경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이 실천일지를 쓰는 순간을 가장 기다리게 되었다. 어린왕자가 세 시에 온다고 하면 두 시부터 황금 들판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우의 마음이 된다. 하루 중 언제 이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 내내 주의를 쏟는 내 마음은 사랑을 기다리는 꽃순이의 마음이 되곤 한다. 이럴 수가. 내가 나와 사랑에 빠지다니. 가장 내밀하고도 날 것 그대로의 농도 짙은 ‘지금, 여기에’를 위해서 나는 발그레 뺨을 붉히며 오늘도 Being 중.
프란츠 마르크 <꿈>
빨강과 파랑과 노랑, 색의 삼원색이 강렬하게 채색된 이 그림에는
날 것 그대로의 순수와 본질이 드러나 있다.
어떤 색을 얼마만큼 더하고 빼느냐에 따라
내가 갖는 다양한 삶의 비유가 그림으로 드러날 것이다.
새로이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꾸어보는 본질의 꿈. 참나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