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 교수는 피해자에서 살아가는 주체자로서 위치성을 바꿨다. 사회복지 공부로 아픈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었다. 작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는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외상 후 성장' 연구였다. 노출되는 부위에 중화상을 입은 사람들과 그 가족 관계가 긍정적으로 변화한 경우를 연구했다. 조사 결과,경험자들이 부정적인 경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상 후 성장을 경험을 했다. 외상을 겪고, 회복 과정 후에 경험하는 긍정적인 변화가 트라우마 이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결과를 도출했다.
트라우마란 상처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전 세계 인구의 76퍼가 상실에 의한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혼이나 이별의 고통, 병의 진단, 사고의 충격, 폭행이나 자연재해 등을 겪으며 심리적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는다. 이지선 교수가 한동대를 재직할 때 포항에서 있었던 지진을 경험했다. 단 10초에 불과했으나 기억자아는 강렬한 공포로 인식했다. 잡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던 10초간의 공포의 기억은 엉뚱한 자리에서 기억을 토했던 모양이다.
평소였으면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엄마의 사소한 한마디가 분노를 불렀다. 스트레스 반응이었다.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악몽, 수면장애로 이어지며 과민하게 경계하고 불안해하고 ,회피하면서 정서적 마비 현상을 불렀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2차적 감정인 수치심과 죄책감이 올라왔다. 그런 자신을 다시 비난하고 공격적 행동을 이어갔다. 건강한 방식으로 슬픔을 애도하고. 잘 보내야했다.
우울한 감정은 신체적 문제를 동반한다. 이런 부정적 정서나 고통이 꼭 나쁘기만 할까?<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 박사는 '불행에는 본질적으로 좋은 것은 없지만,불행으로부터 좋은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라고 했다. 사람은 비바람이 불면 넘어지지 않으려고 휘청거리며 저항하다가 회복한다. 회복한 뒤에는 자신처럼 삶의 의미를 재정립해서 재구성해나간다. 삶은 예측 불가능하며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은 약하고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비록 고통스러우나 진실을 마주하는 동안 성장의 기회를 맞는다.
"배우고자 한다면 개인적 변화는 반드시 일어난다. 더 취약한 상태에 놓여도 더 강한 의지가 이전에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게 한다. 그에 더해 관계의 변화 위기를 경험한 사람은 누가 자신의 진정한 친구인지 알게 된다. 공감이나 연민이 커져 사회지능력이 탁월해진다.그에 더해 인생 철학의 변화가지 뒤따른다. 삶에 대한 감사가 일어나고, 일상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우선순위의 변화가 일어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는다. 이런 변화들은 뜻밖의 선물이다. 그림을 보는 과정같다. 일상이라는 작품을 두고 한번 보고 두반 볼 때마다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된다.
깨진 꽃병을 원 상태로 복구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자신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어떤 이들은 남을 비난함으로써 자존감을 지킨다. 충분한 애도 후,누군가는 깨진 꽃병의 조각들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또 어떤 이는 교회나 성당으로 가는 길만을 생각한다.그 역시 개인적 선택이지만 잊지말고 해야할 것이 있다.
첫째는 상처를 무조건 묻어두는 게 아니라 의도적 반추(생각의 되새김질)를 해야한다. 그 반추 중에 당시 발견하지 못했던 그 일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 세월호나 이태원희생자들을 위한 심리지원이 왜 지속되어야하는지 알 만하다. 둘째,정서적 노출을 하라.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해야한다. <윤리학>을 쓴스피노자는 부정적 감정을 명명하는 순간 (알아차림의 순간)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노래로 말로 그림으로 춤으로ᆢ
셋째는 사회적 지지인 존중,관심,애정을 충분히 느껴라. 누군가 나를 응원하는 따듯한 눈을 가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끊임없이 손잡는 일을 해야한다. 이지선에게는 성실하게도 병원에 찾아오던 친구가 있었다. 말수가 없는 친구인데다, 그 친구와는 특별한 추억도 없었다. 이야기도 없는 친구가 일주일에 한번은 꼭 찾아왔다.이지선은 내심 침묵을 견디는 게 힘들어서 때로는 '언제 돌아갈까' 싶기도 했다. 친구가 한 일은 '네가 오늘 살아남길 바래. 오늘도 잘 살아남길 바래'라는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그 진구와는 지금도 친한 건 아니고 만나도 어색하다. 그러나 함께 하는 그 순간 보내는 진심이 큰 의미였다.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으나 만나는 그 순간이라도 스트레스가 줄어들길 바라는 마음.
넷째. 자신의 삶을 다시 쓰기ᆢ나는 상처입은 희생자인가? 어려움을 극복해낸 사람인가? 사고를 '당했다'라 말하는 순간, 피해자로 살고 있다는 고백이 된다. 적어도 이 순간을 지나며 얻은 선물과 지혜를 생각한다면 언어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라, 사고를 만났다라고 한다. 이미 그 사고와 헤어졌다. '나는 그날 이후의 시간을 살았다.살아남기를 참 잘했다.'~~' 나는 사고와 만났다가 잘 헤어진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 이지선입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며 또 다른 성장을 한다. 외상 후 보이는 슬픔이나 우울감 같은 반응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세상은 하지 말아야 할 폭력적인 말을 쏟아낸다. '그만하면 슬퍼하지 않아도 되잖아'라며 시간을 제한한다. 슬픔이나 고통도 각자의 속도가 있다. 누구도 그 시간을 제한할 수 없다. 지금 이 시간, 아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잊지 말아라. 당신우 혼자가 아니다. 성장은 여행이다. 외상 후 성장은 단순히 변화의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오르락 내리락을 경험하며 성장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ICF 20주년 기념 컨퍼런스가 열리던 장내가 숙연해졌다.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가만 고개를 숙였다. 뜨거움이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왔다. 옆자리에 앉은 코치님이 오늘 이 기조 강연만으로도 모든 걸 말해준다고 표현했다. 이지선은 진정으로 삶을 뜨겁게 맞은 사람이자 변화와 성장이 무엇인지 삶으로 증명했다. 그녀는 코칭에서 얘기하는 늘 해오던 생각대로 살아가지 않고 새로운 선택으로 새삶을 열었다. 부정적 정서에 함몰되지 않았으며, 자동 도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수용전념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삶의 주체자로서의 내러티브로 자신의 서사를 새롭게 써나갔다. 메타인지를 발동하여 자신의 고통을 배움의 과정으로 치환했다. 생을 향한 감사와 사랑으로 자신을 원하는 상태로 셀프코칭했다.
그녀는 자기인식력이 뛰어난 사람이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었다. 고통에 경중을 따질 순없다. 하지만 그 의미를 해석하는 주도성과 자율성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나의 현주소를 더듬어본다. 스스로에 대한 인식력을 높이는 게 모든 소통의 거의 모든 것임을 깨달아가는 지금이다. 이지선 교수의 강연이 나에 대한 확신을 높이는데 부스터가 되어주었다. 삶은 이토록 아름답다. 배우겠다고 작정하고, 감사하다고 작정하는 순간. 꽤 괜찮은 해피엔딩.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