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용재 오닐 '당신을 위한 기도' 비올라 리사이틀을 다녀와서
접신을 한 듯했다. 그의 몸짓이 소리였다가 그의 활이 이야기였다. 냉큼 다가서다가 슬쩍 물러나고, 포효였다가 흐느낌이고. 나는 보았다. 음율이 춤이 되는 낯선 장면을. 절규가 된 그를 대신해 비올라가 온 몸으로 울었다. 음악에의 찬미를, 그대의 안녕을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리처드 용재 오닐. 그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청년’으로 내 마음에 각인된 사람이다. 십 여년도 더 전. 어느 깊은 밤, 무심코 돌린 tv 채널에서 그의 표정을 포착하고 홀린 듯 그를 알아갔다. 서번트 증후군의 사람들이 보이는 무서운 집중력과 천진한 미소. 그때 이미 그에게서 거장의 전조를 보았다.
한번 만난 일 없어도 예술 작품과도 분명 궁합이 있다고 생각한다. 뇌과학이 밝히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 어디에도 존재하는 에너지 파장이 ‘끌림’의 현상을 부른다는 설이 일리가 있다 싶다. 거의 보지 않던 TV를 틀었는데 용재가 ‘섬집 아기’를 구슬피 연주하고 있다. 어느 날엔가는 오지 섬 아이들과 오케스트라를 꾸려 혼신을 쏟고 있다. 무심코 접속한 인터넷에서 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2번 D단조가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작정하고 들은 시간보다 우연히 마주친 때가 더 많았다.
그런 그가 독주회를 한대서 몇 달을 설렘으로 또는 조바심으로 기다렸다. 코로나19가 혹시 발을 묶지는 않을까 맘을 졸이며 기다렸다. 가면무도회를 하듯 관객들은 기꺼이 마스크를 썼다. 유물이라도 영접하러 온 듯 우리는 흔쾌히 소독을 했으며, 첩보 영화라도 찍듯 신분을 드러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표현했듯 용감했고 경건했다.
그의 비올라는 언제나 읊조리고 말하고 노래한다. 악기로서보다 사람의 음성을 대신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가 성악곡을 레파토리로 자주 정하기도 하지만 그의 연주하는 자세는 온 몸을 기울여 잘 듣고 뜨겁게 대화하는 듯, 언제나열려있다. 협연하는 연주자들에게 확 다가섰다가 가만 물러났다를 반복한다. 운명을 거스르는 용감한 사내였다가 달콤한 속삭임을 건네는 연인이다가......피아니스트 일리아 라쉬코프스키와의 협연,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실연당한 청년의 쓸쓸함을 시를 읊조리듯 단락 단락을 주고 받으며 겨울의 애상을 충분히 드러낸다.
마왕을 연기하는 리처드 용재 오닐과는 달리 다소 밋밋해보이기까지 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그 둘의 묘한 조합으로 마왕과 아버지, 그리고 섬세한 어린 아들의 긴장과 체념이 잘 표현되었다.쫓고 쫓기며 운명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숨바꼭질을 가감없이 표현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표정으로만 다 드러나는 게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큰 동작들이 우아한 춤을 추는 듯하다. 팔이 길어서 우아할 수 있다는 걸 또 실감하게 된다. 활을 긋는 선이 아주 확장이 되어 감정을 저장할 품이 더 커지는 느낌이다.
화면상으로 주로 잡히던 섬세한 표정과 손의 움직임을 봤었다. 현장에서는 무대를 꽉 채워 품는 몸짓을 보니
그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교감하려던 노력이 한 눈에 들어온다. 호흡 한 마디 한 마디 다 절절함을 담고 있다.
저러다 쓰러지지나 않을지 조마조마해질 만큼. 끊임없이 눈빛을 교환하고 관객들을 향한 호기심의 눈을 거두지 않는 그는 미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디토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 2부는 비교적 익숙한 레파토리들로 가만가만 위무하는 손길들로 채웠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의 유려하고도 섬세한 음율로 시작해서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브루크뮐러의 야상곡에 이르기까지 현악기의 울림을 속속들이 맛보는 시다.
젊은 호흡이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 첫 현이 그어지자
작은 탄식들이 새어 나왔다. 쇼스타코비치의 어둡고도 중후한 춤곡으로 그 서정을 이어나갔다.
클래식 기타계의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는 김진택과 함께 하는 <라 로마네스카>와 어우러진 무대는 코로나19로 상흔을 새긴 이들의 애달픈 마음을 달래는 듯 구슬펐다. 기타를 제대로 계승해온 스페인 곳곳에선 코로나 19로 이별한 친지를 동료를 추모하는 슬픈 기타들이 노래를 하고 있겠거니 숙연해진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뉴요커의 캐주얼한 복장에 비올라를 자기 몸의 일부로 가져온 그는 맘껏 행복에 겨워 휘둘렀다. 자기를 바라봐주는 관객들이 있다는 희열을 감출 길 없어 그는 어린아이였다가 중년의 삶을 얘기하는 이야기꾼이었다가. 허공에 정지된 채 내려올 줄 모르던 마지막 활, 그의 엔딩 기도에 함께 숨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흘러내리던 슬픔, 광대처럼 온전한 웃음, 온 몸으로 춤추다 머물던 찰나의 정지, 그 모든 게 어우러져 그의 기도가 되었다. 그는 슬픔의 원형질을 유전적으로 타고 났다. 장애를 갖고 전쟁통에 버려졌던 그의 엄마, 그런 엄마를 입양해서 불가능은 없음을 보여줬던 미국인 외할머니. 그런 모계의 정서를 이어받은 리처드 용재 오닐은 언제나 나약한 자를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사람. 제자들에게 ‘밥은 먹었는지?’‘괜찮은지?’‘혹시 연주회를 떠날 경비가 모자라지는 않는지?’를 묻고 다닌다. 음악이 구원일 수 있는 제자들에게 발목 잡는 일이 없길 바라는 그의 긍휼은 제대로 애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말랑함이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은 이다. 자신의 사명을 이룬 이이며 여전히 그 소명을 다한다. 그의 음악이 일으키는 공명이 다시 삶을 일으킬 용기를 준다. 허공을 가르던 마지막 활시위의 떨림이 삶을 여전히 기쁜 마음으로 초대할 수 있음을 알린다. 잔향이 그 여운이 많은 이들을 살린다. 사람은 저마다 단 한 명에게라도 어떤 의미이고 싶다. 단 한 순간에라도 그 무엇이고 싶다. 그런 간절함과 애틋함이면 험난한 세상을 건너는 일도 외롭지 않을게다.
음악에게
- 슈베르트
축복받은 예술이여
어두운 시간 속에
인생의 잔인한 현실이 나를 둘러쌀 때
너는 나의 마음에
온화한 사랑의 불을 붙여
나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는구나
종종 너의 하프에서 흘러나온 한숨,
그대의 달콤하고도 신성한 화음은
보다 행복한 시간의 하늘을 내게 열어주었지
그대 사랑하는 예술이여, 그것들에 대해 그대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