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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해경

공사장 옆에 놓여 있는 안전모

오늘도 누군가의 생명을 구한 모자겠지. 이 조그마한 사물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프롤레테리아들의 잔해가 쌓였을까. 근데 어쩌면, 이 안전모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해방 아닐까? 물론 그 조건은, 누구의 머리에도 돌이 향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안전모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겠지.


책장에 꽃아놓은 과거 성적표들

여러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고, 맨 아래에는 총점이란 글자와 함께 평균을 낸 두자릿수의 숫자가 적혀있다. 과거를 뒤로 하고, 공지를 보기 위해 대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이번엔 알파벳과 기호들이 불규칙하게 쓰여있다. 이상하다. 나는 숫자로 구성된 컴퓨터도, 알파벳으로 불리는 양인도 아닌데 왜 나는 그들로 불리는가. 나는 이방인인가? 아니면, 전자제품인가.


너무 낡아 쓰이지 않는 스마트폰

매년 새로운 스마트폰이 나오고, 사람들은 그에 열광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꾸지만, 우리 집에는 꽤나 오랜 시간 쓰인 스마트폰이 있다. 더는 전화기로 기능하지 못하니, 나름 알차게 썼다고 할 수 있다. 그 스마트폰에는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이 수도 없이 담겨져 있다. 처음 이빨을 뽑았을 때의 눈물진 얼굴, 야구장에 가서 웃는 얼굴, 반강제로 배우게 된 피아노를 치는 영상까지, 나의 과거가 무엇보다 순수히 기록된 노트일 것이다. 이제 그 과거는 보지 못한다. 그 스마트폰을 제조한 공장에서 수없이 많은 프롤레테리아는 흩날렸다. 그 가루는 지금, 이 낡은 스마트폰 속에 있는 걸까.


어린 시절 책 안에 꽃아놓은 네잎클로버

지금이나 어릴 때나 산책하는 것, 특히 녹색의 숲을 걷는 것을 참 좋아했다. 어릴 때 네잎클로버를 보면 희망을 상징한다는 얘기가 떠올라 항상 가져와 책에 끼워놓았던 것 같다. 별 것 아닌 잡초 같지만, 누군가에게는 작은 기쁨을 선물해주는 생명체. 그 생명체는, 역사라는 차갑고 어두운 열차를 비추는 작은 등불이요. 열차의 창문이 조각나고 매서운 바람과 함께 프롤레테리아들의 잔해와 섬광이 열차 속에 도래할 때 그들을 비추어주는 태양과도 같은 조명일 것이다.


밤 10시에 고등학생들

대한민국은 22시 이후에 학원 수업을 금지시키는 법이 존재한다. 원인은 없애지 않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외형만 들추어내는 대한민국의 '도덕적인' 정책에 알맞은 정책이다. 그 덕인지, 22시에 학원가나 중심가를 걸으면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우연히 친분이 있는 아이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눈빛은 별을 박은 듯 빛나지만 말할 기운조차 없어보이는 아이에게,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죄수호송인의 차를 타는 그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 날, 대학생이 된 친구를 만났다. 한껏 차려입은 듯한 옷, 무거운 가방 대신 한 손에 지갑과 휴대전화만 들고 헤드셋으로 음악을 음미하며 서있는 그를 보니 대학생은 다른가 싶다. 그리고 그 대학생의 눈은, 그 어느 순간에도 빛나지 않았다. 해방의 희망을 품은 아이와, 해방의 희망을 일련의 쾌락으로 대체한 아이. 우리는 각자 꿈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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