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의 마지막 날이 되면, 고인의 몸은 하이얀 가루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 뜨거운 온도로, 고인의 몸은 바스라운 가루가 되어 돌아온다. 아, 이 얼마나 차가운 사회인가. 숫자와 기호만 다를 뿐, 모든 생명이 프롤레테리아가 된 이 사회가 얼마나 차가운 사회인가. 그 프롤레테리아를 위해, 살아생전 차가운 냉기에 외침을 잃은 프롤레테리아를 위해, 그의 마지막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보내주는구나. 그러나 이거 하나는 부탁하고 싶다. 그 몸은 태워도, 그 기억만큼은 태우지 말아다오. 그 기억을, 더 이상 조각낼 수 없는 프롤레테리아의 가루 속에 심어다오. 그 가루는, 여전히 의미를 간직할 것이니.
날이 따뜻한 주말, 공원을 배회하다보면 솜뭉치와 같은 아기들을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배시시 웃기도 하고, 볼이 터질 듯이 숨을 모아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아이의 웃음을 볼 때 표현 못할 귀여움이, 울음을 볼 때 그 어린 서글픔에 귀여움이. 웃음과 울음 모두 내 입가를 미소 짓게 한다. 순간 어느 어른이 다가와 우는 아이의 입가를 올린다. 그 반대편에는 다른 어른이 웃는 아이를 진정시키며 입가를 내린다. 웃음과 울음이 침묵하니, 공원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 안정 속에서, 어른들은 일자의 입가를 가진 아이의 사진을 찍는다.
금관을 쓴 자들을 향해 글을 쏘았던 한 문필가의 노트는 검은 줄에게 그 본질을 잃었다. 문필가의 몸이 냉기로 뒤덮인 순간조차, 그의 글은 검은 덮개를 개어나지 못하였다. 50년 뒤, 그 문필가의 묘비에 이끼로 가득찬 그 시간에, 그를 칭송하는 자들은 검은 덮개의 주인들에게서 금관을 빼앗았다. 검은 깃발이 꽃혀있던 광장은 붉은 깃발로 바뀌었고, 그 문필가의 묘비는 이끼 대신 붉은 페인트로 뒤덮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문필가의 노트는, 붉은 덮개 아래에서 잠들게 되었다.
보통 물건을 주문하면 그 물건은 연한 갈색의 종이로 뒤덮여 내 앞에 온다. 그 물건이 최대한 순수하고, 그 본질을 지켜낸 상태로 새로운 인연과 만나게 해주는 그 종이는 우리가 그 물건을 두 손으로 감각할 때 그 역할을 다한다. 상자를 벗겨내는 과정은 기대감의 순간이다. 그 기대감의 들떠 우리는 그 상자를 조심스레 벗긴다. 어떠한 사유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명이란 본질을 지키기 위해, 그 생명을 감싸고 있는 상자를 벗기는 것. 슬프게도, 현실은 그 상자에 집중한다는 사실일테지만.
1월의 졸업, 3월의 개학. 흩날리는 허이얀 부스럼이 살랑이는 하이얀 조각으로 우리에게 닿을 때. 여러 참고서를 담았던 나의 가방에는 단 하나의 노트만이. 카페인을 입으로 전달해주었던 내 손에는 카페인 대신 알코올이. 한껏 가벼워진 어깨와 카페인의 무게 대신 알코올의 날개를 달고 선선한 바람의 몸짓에 의존하여 달 아래에 나의 발로 그림을 완성한다. 그 작품을 기념하듯, 하이얀 조각 휘날리며 손등에 닿았고, 눈 앞에 무언가 나타났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 몸도 선으로만 감각할 수 있었다. 숨결에도 부서질 듯한 그 여린 조각은, 그 형상에게 향했다. 그 조각이 그에게 닿은 순간, 나의 눈은 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형상은 내게 다가와, 나의 손을 따뜻히 어루만지고 들리지 않는 외침과 함께 떠났다. 눈을 뜨자, 그 조각은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의 그림엔, 형상의 얼굴이 웃음지으며 그려져 있었다. '사랑'이라는 모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