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Strangers라고 부른다. 룸메이트 3명과 나.
영어와 요리는 그녀에게 맡기자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낯선 존재로 여겼으며 서로를 관찰하는 시기였다.
미국에서 만날 나의 첫 룸메이트는 영어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가끔은 마음으로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긴 하지. 한인 룸메이트가 영어를 전공한 학생이었고 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식량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적응기를 지나며 식탁은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요리해서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 잘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요리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고 했다. 요리를 알지 못하는 나는 또 다른 세계를 본 것이다. 자신이 준비한 요리를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맛있게 먹고 식기류와 주방을 깨끗하게 정리하며 만족감을 느꼈다.
그녀는 요리를 하면서도 TV에서 들리는 영어문장을 다 알아듣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반면에 나의 뇌는 모든 영어와 차단돼있는 것 같았다. 어학에 남다른 능력을 가진 이들을 보면 한 인간은 그저 예정된 섭리 같은 것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만 보리차는 신중해지길
대부분 처음에는 약간씩 향수병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대자연 속에서 이곳도 살 만한 곳이고, 과히 나쁘지 않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나의 영, 혼, 그리고 육의 건강함은 또 그대로 다른 차원의 영역임을 알게 되었다. 환경이 깨끗한 곳에서 살면서 발목에 있던 아토피 피부염이 사라지는 등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분주했던 삶을 뒤로하고 매일 책상에 앉아서 누리는 Quiet Time은 삶을 평화롭고 의미 있게 채워주었다.
나는 초기에 매일 물을 끓여 마셨다. 아파트 공용 식수를 담아 운반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무엇보다 보리차의 부드럽고 은은하고 고소한 향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한인 룸메이트는 점차 내가 끓인 물을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루 만에 그 물을 다 마시기
시작했고 내가 필요할 때 마실 물이 없었다. 그녀는 알고 보니 물먹는 하마였던 것이다. 이번엔 물이 잘못했네. 나는 그녀에게 이제부터는 직접 물을 끓여달라고 요청했다. 불필요한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녀는 물을 끓여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물통에 식히지 않은 보리차를 지속적으로 부었다. 결국 물통이 찌그러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새 물통을 사면 해결될 문제였지만, 며칠 후에는 냉장고 문 여는 소리와 함께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내가 한 발짝 늦은 걸까. 나는 주방에 쏟아져 있는 물을 보았고, 마치 유령이 지나간 것처럼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룸메이트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는 책임을 회피하며 말 끝을 흐리며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짜증스럽게 나를 바라보면서도 그 물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이토록 사소한 상황들을 마주하며 물 끓이다가 속이 끓었던 시기는 또다시 금세 지나갔고 물로 인한 갈등도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Water Clear.
Barley Tea Clear.
돌돌돌돌 살금살금: 어둠의 그림자
기숙사는 방이 2개, 화장실이 2개였다. 내가 머물렀던 1번 방은 방 침대에서 바로 1번 화장실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시차적응이 덜 된 상태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샤샤샥.
이 집에는 유령이 많은가? 그것은 바로 2번 방을 사용하던 룸메이트가 내 1번 화장실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본인의 화장실 대신 내 공간을 자주 찾는 그녀의 모습은 이상하고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물티슈 커버를 뜯는 소리와 함께 돌돌돌돌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밤마다 타인의 휴지를 사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나라면 휴지 한 박스 선물했을 것 같다. 나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며 그녀가 연속적으로 손대는 나의 물건에 대해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로 넘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구나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Keep Silent
자물쇠는 채우고 풀고
어느 날 나와 함께 방을 사용하던 대만 자매 중 언니(1)가 뿔이 났다. 우리는 그 당시 영어실력으로 자연스러운 소통은 어려웠지만, 대략적으로 들어보니 자신의 가방이 반쯤 열려있었다는 이유였다. 우리가 학교를 다녀온 사이에 누군가가 열어봤다는 것이다. 자크 위치를 기억한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그날 룸메이트 중 단 한 명이 학교 수업을 결석하고 집에 남아 휴식을 취한 날이었다. 누군가를 의심하는 일이 계속되니 참 마음이 불편했다. 어느 때부턴가 우리의 아파트는 경찰 놀이를 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대만 자매 중 언니 (1) 은 책상에 물건 하나라도 삐뚤어져 있으면 못 견디는 사람인데 하필 그 가방을 열어보다니. 강심장이네.
나는 그런 학생과 방을 함께 사용했으니 불편한 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나의 폭탄 책상과 옷장과 침대가 그녀에게 얼마나 방해가 되었을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자물쇠를 떠올렸다.
단단하게 채우는 물리적 장벽은 의심을 차단하기 위한 대책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침범을 금지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서로 의심하지 않고 불안감 가득한 스파이 소설을 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은 때로는 단단히 채워야 할 자물쇠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서로에게 침범하지 말아야 할 그 무언가를 열심히 채우고 풀고 채우고 풀고.
Mission Clear.
그렇게 이 사소한 문제도 더 이상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함께한 경험들을 통해 서로를 더욱 잘 알아가게 되었다. 생일파티, 수영, 미술관 산책, 그리고 교회 참석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낯서 색을 벗겨재며 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