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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Apr 15. 2022

해병의 비문학은 문학보다 기이했다

아쎄이... 기열!

해병문학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에는 꽤나 오래전부터 ‘해병대 갤러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포항 해군기지 밥을 먹었던 아저씨들이 기수를 논하며 땀내 나는 추억을 더듬는, 상당히 충실하게 이름값을 하며 노는 동네구나 싶은 정도였던 곳이었죠.


그러나 2020년 즈음 한 사건이 알려지며 갤러리 분위기가 격변을 맞이하게 됩니다. 해병대 복무 중 후임의 유두를 스패너로 비튼 20대 남성이 재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던 건이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가해자는 심지어 한 후임병에게 철제 절단기로 다른 병사의 젖꼭지를 자르라고 강요했던 바도 있었습니다.


당시 네티즌은 판결에서 드러난 비위행위의 성적 가학성에 지대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해병문학’은 그러한 네티즌 중 일부가 그들의 ‘군기 잡기’를 조롱하는 창작물을 2021년부터 해병대 갤러리에 유포했던 것에서 비롯했습니다. 대부분은 해병대가 군기와 규율을 바로 세우기 위해 행한다 주장하는 ‘얼차려’를 하드코어하면서도 지저분한 성애로 비튼 동성 음란물이었습니다. 초창기 해병문학 세계관은 ‘황근출’이라는 가상의 해병을 중심으로 정립됐습니다. 한때 인터넷에서 제법 자주 보이던 “네가 선택한 ㅇㅇㅇ(원문은 해병대)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대사도 그가 작중에서 뱉은 말이었습니다.


황근출 해병 팬아트./디시인사이드 해병대 갤러리

  

풍자와 해학이 목적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의 과장은 있었으나, 그래도 이즈음엔 가상의 이야기에도 현실 해병대의 특징을 가급적 충실히 반영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일례로 해병문학에 등장하는 해병대가 공군을 극도로 무서워한다는 컨셉은 이미 이 무렵에 잡혀 있었는데요. 이것은 1966년에 해병대 장교들이 공군 장교들에게 시비를 걸다 공군비행학교를 덮치기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흠씬 얻어맞고 궤주하던 도중 익사자까지 1명 발생했던,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 사건’을 모티브로 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타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로, 해병문학은 오래지 않아 소재 고갈에 직면했습니다. 사실 샤워실에서 후임의 몸에 소변을 보거나 성기를 만지는 등 성추행을 130여회 넘게 일삼은 사건이라던가, 불과 15일 만에 4차례에 걸쳐 후임에게 입을 맞추거나 엉덩이를 더듬으며 추행한 사건이 벌어지는 등, 해병대발 이슈 자체는 끊긴 적이 딱히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론 보도까지 되는 사건은 내용이 대체로 거기서 거기인데다 어느 정도는 수위 조절까지 되다 보니, 이내 문학적 관점에서 신선하게 다뤄볼 만한 가혹행위가 부족해졌던 것이죠.


그리하여 해병문학은 병사가 간부와 일대일 대결을 벌여 부대 지휘권을 넘겨받거나 재미교포를 납치해 해병대에 강제 입대를 시키는 등 판타지 개그물의 영역으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른바 ‘전우애’라 에둘러 말하는, 해병문학의 근간이 된 가학적이면서도 수위 높은 성고문과 동성 난음 만큼은 이 시기에도 작품 내에서 여전했습니다.


그러나 공상 소설의 영역으로 차츰 접어들던 해병문학이, 다시 현실의 이슈로 회귀하며 르네상스를 맞이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불씨를 지핀 이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였습니다. 2022년 2월 즈음 해병대사령부에서 해병문학을 지목해 ‘정화활동’을 지시한 문건이 유출됐던 것입니다.


외부 유출된 해병대 문건. ‘오도(誤道)’란 잘못 전승된 해병 정신이나 문화를 뜻하며, 그렇기에 해병문학에선 되려 ‘해병다운 짓’을 비꼬는 접두사로 흔히 활용합니다./디시인사이드

 

영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가혹행위는 내내 묵인했던 해병대가, 해병문학은 자기네 ‘이미지 실추’를 명분으로 규제하려 드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부조리와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그중에도 가장 격하게 반발한 이들은 바로 ‘해병대 전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체면만 생각해 일을 덮으려 들 뿐 복무하는 병사의 처우엔 무관심한 사령부에 분노했고, 급기야는 본인들이 실제로 겪었던 온갖 가혹행위를 여과 없이 쏟아내며 ‘해병문학 덮기’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이것이 곧 ‘해병비문학’ 시대의 서막이었습니다.


‘현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는 옛말도 있긴 합니다만. 해병대 전역자들이 털어놓는 이야기가 실로 그러했습니다. 후임의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성경책을 ‘악기바리(식고문)’ 명목으로 찢어서 먹인다거나, 익사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병사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OST인 ‘Under the Sea’를 부르게 한다거나, 개나 비둘기 사체를 ‘전우의 시신’이라 칭하며 억지로 먹게 했다거나, 후임을 연병장으로 불러내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이는 등, ‘창작자’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시나리오들이 논픽션으로 터져 나왔죠.


더군다나 3월 즈음 현역 해병대 일병이 가혹행위와 병영부조리를 피해 우크라이나 국제군단 합류를 시도하는 사건까지 터지며, 해병문학을 ‘허무맹랑한 거짓 내용으로 해병대를 모욕하고 음해하려는 수작’ 정도로 치부하려던 움직임은 동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해병대사령부는 문건이 유출된 이래 내놓은 공식 입장이 딱히 없습니다. 그리고 해병대 갤러리엔 지금도 여전히 ‘전우애’가 가득한 해병문학이 업로드되고 있습니다. 다만 전반적으로 예전에 비해 판타지적인 경향이 한층 더 강해지는 분위기입니다. 예전엔 간간이 보이던 ‘있을 법한 일’을 서술하려는 노력이 훨씬 드물어지고, 현실에선 애초에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한 글이 보다 흔해졌습니다. 어쩌면 논픽션을 뛰어넘지 못하는 자신의 빈곤한 상상력에 낙담한 창작자들이, 차라리 노골적인 픽션 쪽으로 전개를 틀며 잔혹하고도 기이한 ‘해병비문학’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규 코너 발굴 차원에서 최근 인터넷 이슈나 트렌드를 정리해, '지금 인터넷에서는' 타이틀을 THE PL:LAB INSIGHT에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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