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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Nov 05. 2021

개와 늑대의 시간

평판 조회가 이따금 하는 거짓말

국내 한 대기업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요. 어느 날 모 부서의 팀원 한 명이 근무 중 헤드헌터로부터 직속 상관인 부장의 평판을 묻는 전화를 받았다 합니다. 알고 보니 그 부장은 서치펌을 통해 다른 기업으로 옮기는 협상을 은밀히 진행 중이었고, 온갖 절차를 순탄하게 넘긴 끝에 레퍼런스 체크 단계까지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야 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못해도 한 번쯤은 겪는 흔해 빠진 스토리입니다만.


문제는 그 부장이 본인 팀은 물론 업무로 얽힌 다른 부서까지 다각도로 폐를 끼치던, HR 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곯아 문드러진 사과 같은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계열사에서마저도 그와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몰래 나왔었다 하는데요. 평판 조회를 요청받은 팀원은 그 부장과 근무하는 부서가 같았던 만큼, 당연히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 중 한 명에 속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직원은 헤드헌터의 갑작스런 문의에 어떤 식으로 대응을 했을까요.


그의 선택은 바로, 열과 성을 다해 부장을 칭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드헌터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잽싸게 주변에 연락을 돌렸다 합니다. “그 부장 이직한댄다, 평판 조회 결과가 나빠서 탈락해 여기 남으면 안 되니, 혹시 레퍼런스 체크 들어오면 무조건 좋은 말만 해 줘라”는 내용으로요.


모두의 바람과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부장은 별다른 클레임 없이 회사를 옮길 수 있었다 합니다. 떠난 부장은 행복했고, 남겨진 직원들도 행복했고, 매칭에 성공한 서치펌과 헤드헌터도 행복했고, 평이 훌륭한 인재를 얻은 회사도 행복했습니다. 먼 훗날 그 부장의 실체를 폭로하는 찌라시가 기자들 손에 넘어오긴 했습니다만. 뭐 어떡하겠습니까. 채용 절차는 이미 마무리된 지 오래였는데요.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노을이 퍼지며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어, 언덕을 넘는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나를 맞이하는 개인지 사람을 해치고자 달려드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해 질 무렵 시간대를 일컫는 말인데요.


/게티이미지뱅크


레퍼런스 체크에 도달한 시점은 어쩌면 채용에 있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루가 끝날 즈음 나를 향해 달리는 무언가가 어렴풋이 보이긴 하는데 그 정체까진 확실한 파악이 어려운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후보자의 윤곽이 어느 정도는 드러나는 채용 막바지 시기지만 그를 완벽히 알았다 장담하기엔 다소 부족함이 있는 때니까요.


석양에 묻힌 그림자의 실체를 확인하려면 가까이 다가서거나 소리를 내 불러 봐야만 하듯, 후보자의 인성과 자질을 보다 분명히 들여다보려면 레퍼런스 체크를 진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신호를 보냈을 때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모두 진실이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앞서 언급한 모 대기업 부장님 사례처럼 말이죠. 간교한 늑대가 충견을 가장해 멋모르고 접근한 사람을 덮칠 위험을 무시하기 어렵듯, 평판 조회 과정에서도 모종의 이유로 잘못된 시그널을 일부러 뿌리며 채용을 교란하는 세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후보자 검증은 데이터를 얻기 위해 접촉하는 범주가 폭넓어야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관찰을 시도할수록 해거름을 뚫고 오는 짐승의 정체를 바르게 파악해낼 확률이 높아지듯, 후보자 또한 품을 들여가며 다각도로 공들여 보아야 그의 본모습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후보자의 동료와 지인을 샅샅이 훑으며 진솔한 이야기를 전해 줄 이를 찾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평판 조회를 요식행위 정도로 치부하면서 응답을 쉽사리 주는 사람 몇몇에만 이야기를 듣고 마는 관행만큼은 삼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글은 2021년 11월 4일 개인 링크드인에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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