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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Nov 12. 2021

배고픈 쥐가 굶주린 아이를 물었네

우리가 배우고 또 공부해야 하는 이유

대학 시절 지리학 전공 수업을 듣다 보면 은근히 희한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접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요. 미국 학자 윌리엄 번지(William Bunge)의 연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선 디트로이트가 시 당국 차원에서 파산을 선언하는 등(2013년 7월) 비참하게 몰락한 도시의 대명사로 통했지만, 사실 1970년대에 닥쳐온 오일 쇼크 사태 전까지만 해도 디트로이트는 전미에서 가장 융성한 도시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제너럴 모터스와 포드, 크라이슬러의 본사가 모두 자리 잡은 도시였던 덕에 북미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로 인정받았고, 아예 미국 자동차 산업계를 뭉뚱그려 ‘디트로이트’라 부르는 때도 있었죠.


그런데 디트로이트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0년 즈음, 도시 곳곳에서 묘한 괴담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부모가 눈을 떼면 쥐 떼가 아이를 문다’는 소문이었는데요. 방역이 미비하던 시절이라 쥐가 사람 사는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그리 드물진 않았습니다만. 그러한 사태를 흔하다 말할 수 있는 곳은 어디까지나 시골 지역에 한정되긴 했죠. 하물며 당대 미국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여유로이 들던 도시인 디트로이트인지라, 그런 풍문은 꽤나 기이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번지는 그 이야기를 가벼이 흘려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리학 교육을 깊이 받은 학자답게, 만일 사건이 실제라면 발생 장소를 추적해 공간상에 정리했을 때 어쩌면 의미 있는 정보가 도출될 수도 있겠다는 가정을 했죠. 그리하여 번지는 ‘디트로이트 지리탐사연구소(the DGEI, The Detroit Geographical Expedition and Institute)’를 직접 세우고선 소문의 진위 확인에 나섰는데요.


당시 18세 나이로 흑인 인권 운동에 투신했던 여성인 그웬돌린 워런(오른쪽)이 'the DGEI'의 Co-founder로 참여해 번지(왼쪽)의 이 연구를 도왔습니다./CUNY


조사 결과 아이를 무는 쥐는 실존했습니다. 다만 쥐 자체는 디트로이트 전역에 출몰했음에도 아이가 물린 지역은 그중 일부에 그쳤던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아이를 물어뜯는 쥐는 오로지 ‘배고픈 쥐’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먹거리가 풍부한 번화가에서 지내는 쥐는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며 사람에게 덤비지 않았지만, 사람마저 배를 주리는 동네에선 쥐에게도 달리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죠.  


번지가 연구 끝에 발견한 것은, 절정에 달한 디트로이트의 번영 이면에 숨은 ‘가난의 지도’였습니다. 쥐가 아이를 문 지점에선, 디트로이트의 밤을 물들인 네온사인 그늘 밑으로 버려진, 무리 지은 빈민의 보금자리인 ‘slum ghetto’를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slum ghetto’를 배회하는 쥐들은 주로 아이들의 손·발가락과 코끝을 노려 물어뜯었다 합니다. 번지는 이를 ‘hunting’이라 표현했습니다.


the DGEI의 연구 결과 작성된 'Region of Rat-Bitten Babies' 지도./코넬대 도서관


1960년 즈음 디트로이트 시민의 1인당 평균 소득은 미국에서도 선두를 달렸지만, 같은 시기에 ‘slum ghetto’에선 쥐 스무 마리가 아이 하나를 노리는 것이 평균이었습니다. 참고로 대한민국 농림부가 그때로부터 10여 년 뒤인 1970년에 발표한 바,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했던 쥐는 인구 1인당 세 마리 꼴이었다 합니다.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국가에서도 가장 번화했던 도시의 주민이, 전쟁의 상흔을 온전히 씻지도 못했던 개발도상국의 국민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몰려 있었던 셈이죠. 이처럼 디트로이트에 숨은 빈부 격차를 폭로한 번지의 ‘Region of Rat-Bitten Babies’ 지도는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켰고, 당시 학계에서 태동 중이던 급진주의 지리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이 비록 즐겁지 아니하더라도 배우고 또 익혀야만 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누군가의 말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해상도’를 올리는 것 또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래도 품은 지식이 많거나 사고를 확장하는 법을 능숙히 익힌 사람은 동일한 사안을 마주하더라도 빠르게 파악을 해내거나 과감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많으니까요. 실제로 지리학 지식이 풍부했던 번지는 남들과 같은 소문을 듣고도, 타인과는 달리 ‘사건의 공간상 분포를 추적하면 이면에 숨은 중요한 정보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해낼 수 있었듯 말입니다. 똑같은 사진이라도 해상도가 떨어지는 필터를 거쳐 본 사람은 별 의미 없는 모자이크밖에 접할 수 없지만, 고해상도 화면을 통해 관찰한 이는 그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얻는 것과 비슷한 원리죠.


만일 왼쪽 사진의 네티즌이 밀웜이나 스티로폼에 대해 좀 더 잘 알았다면, 스탠포드대 연구팀에 앞서 중대한 발견을 해낼 가능성도 없진 않았겠죠?/네이버


우리네 흔한 일상에만 비추더라도, 미학을 배우고 나면 현대 미술을 하는 화가들이 벌이는 온갖 기행에서도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며, 경제학을 파고들다 보면 어느덧 널을 뛰는 숫자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눈에 띄기도 하죠. 그러한 발견은 때론 새로운 기회 포착이나 능력 향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간신히 넘기는 것조차 버거운 벅찬 나날 속에서 살더라도, 스스로를 위해 지식과 정보를 꾸준히 접하며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노력만큼은 늘 경주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여력이 되는 한에서 말이죠.



*이 글은 2021년 11월 11일 개인 링크드인에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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