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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Nov 03. 2021

소대장들이 무장탈영했던 날

조직을 늘 진단해야 하는 이유

기왕 군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지난 글에 이어 대한민국 육군에서 실제 터졌던 사건을 하나 더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번에 적었던 ‘육사 나온 서울법대생이 소총을 꺼내 들고선’에서 언급한 케이스보다 약 4개월가량 앞서 벌어졌던 일로, 흔히 ‘53사단 장교 무장탈영’이라 부르는 건인데요.


실제로는 조한섭 소위(학군 32기)와 김특중 소위(육사 50기)뿐 아니라 황정희 하사까지 총 세 명이 소총과 수류탄을 들고 근무지를 무단으로 이탈했던, 장교와 부사관을 망라한 초급 간부들의 집단행동이었습니다. 제53보병사단 제127보병연대 4대대 소속 해안 소초에서 소대장 혹은 분대장으로 복무 중이던 이들은, 1994년 9월 27일 오전 2시 40분쯤 돌연 무기를 챙겨 들고선 병영 바깥으로 탈주를 감행했습니다.


사실 탈영 그 자체로 발생한 피해는 아주 심각하진 않았습니다. 소위 둘은 사건 발생 9시간 만인 당일 오후 1시 20분쯤 투항 의사를 표했고요. 홀로 달아난 황 하사도 4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군 수색대에 붙들렸습니다. 이들이 출동한 경찰과 대치하던 중 M16 소총으로 실탄을 발사하는 등 위태로운 순간도 몇 차례 있긴 했지만, 결국엔 죽거나 다치는 사람 없이 상황이 마무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MBC 뉴스 보도 중 일부./MBC 뉴스


오히려 사회적으로 보다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초급 간부들이 끝내 탈영을 택하게 된 내막 부분이었습니다. 조사 결과 이들은 병사들이 조직적으로 공모한 ‘간부 길들이기’의 피해자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시 부대 고참병들은 간부 부임 후 3개월을 조련 기간으로 상정하고, 소대장 방에서 고스톱을 치거나 소위 또는 하사에게 반말을 하는 등 군기 문란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만만히 여긴 간부에겐 “일병 이상 현역병에게는 높임말을 사용하고, 계급이 높다며 날뛰지 말고 참고 생활하라”며 노골적인 압박을 넣었고요.


심지어 탈영 사건이 터지기 1개월쯤 전엔 한 신임 소대장이 이등병을 때리는 병장을 제지하다 병사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는 봉변을 겪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중대장이 주먹을 휘두른 병사들에게 기합을 주는 정도로 사태를 대충 매듭지으려 들자, 그간 쌓여 오던 초급 간부들의 불만이 대번에 폭발해 버린 것이었고요. 물론 이러한 하극상은 비단 제53보병사단 제127보병연대 4대대뿐 아니라, 그 시절 존재하던 부대 대부분에서 벌어지던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두 소위와 황 하사는 1심에서 “군에 만연한 하극상 문제를 사회에 알리기 위해 탈영했을 뿐 개인적인 범행 동기는 없다”고 진술했고요.


동아일보 한 해 결산 지면에 보도된 해당 사건./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아무튼 이 소동이 국내 모든 언론에 걸쳐 대서특필되고서야, 군 수뇌부는 황급히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군이 영창을 복무 기간에서 제외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었습니다. 의무복무 중인 병사가 영창 처분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제도를 손본 것이죠. 그전까진 3번을 거듭해 다녀와 불명예제대를 당하지 않는 이상, 영창은 사실상 업무를 놓고 쉬는 기간이나 다름없었거든요.


2001년에 이르러 ‘하사관’이 ‘부사관’으로 개칭된 것 또한 이 사건의 여파 중 하나였습니다. 고참병을 억누르려면 중간 간부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한다는 발상에 의거해 ‘아래(下)’를 지우며 호칭의 격을 높인 조치라 합니다. 부사관 계급장을 실로 재봉하는 대신 장교처럼 철제로 교체한 것도 그 맥락이 같았고요. 그럼에도 각계각층에서 군을 향해 쏟아내는 비난의 화살을 온전히 막아 내진 못했습니다. 사건 발생 이후 내놓은 대책이 무엇이건, 조직 전체에 퍼져 있던 하극상 풍조를 아주 곪아 터져 버리도록 방치했던 잘못만큼은 결코 지울 수 없으니까요.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조직은 없습니다. 그 어떠한 집단이건 어느 구석엔 향후 재난의 씨앗이 될 만한 발화점을 적어도 한둘씩은 지니고 있죠. 문제는 내포한 위험을 조기에 발견해 신속히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당장 이득이 되는 일에만 골몰하며 잠재적인 리스크를 방치해 두는 조직이 적잖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지난해 2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발표한 ‘갑질 문화로 인한 기업위험과 개선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사내 인권 취약 영역을 모니터링하는 기업은 5.6%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21%가 공정거래 자체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으나, 그중에서 운영 결과를 공개하거나 모니터링 결과를 이사회에 보고하는 비율은 3.2%에 불과했습니다. 사내 임직원이나 하청업체를 상대로 한 ‘갑질 리스크’가 발생하기 쉬운 약점 부위를, 기업 대부분은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참 간부와 고참 병사의 알력’이라는 조직 내 문제를 애써 무시하다 끝내 호된 곤욕을 치렀던 대한민국 육군과 별다른 바가 없는 셈이죠.


꼭 53사단 장교 무장탈영 사건처럼 리스크가 아주 극적인 형태로 폭발해야만 기업에 손상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영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방관한 문제가 조직을 조금씩, 그러나 지속해서 갉아 들어간 끝에 상당한 누적 피해를 먹이는 상황도 그리 드물진 않습니다. 이를테면 ‘갑질 문화로 인한 기업위험과 개선방안’ 보고서에 인용된 설문에 따르면, 임직원 중 67.3%가 갑질 행위로 인해 근로 의욕을 상실한 경험이 있다 응답했습니다. 갑질이 재무에 직접적인 손해를 입히진 않는다 여겨 내버려 두면, 결국엔 근로 의욕 감소, 생산성 저하, 인재 이탈 등을 유발하며 경영 전반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사람이 건강상 취약한 지점을 살피고 질병을 일찍 발견해 쉽사리 치료하고자 정기검진을 받듯, 조직 또한 외관상 드러나는 병폐가 없더라도 숨은 위해 요소를 미연에 걷어내려면 진단을 꾸준히 수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기업은 임직원뿐 아니라 C-LEVEL마저 문화와 구성원 상태를 점검하는 이벤트를 낭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외양간을 매만져 두는 타이밍도 소가 가출을 감행하기 전이 최적이듯, 일이 터지기 전에 파열음이 새는 부위를 미리 찾아 손볼 수 있다면 오히려 그만한 시간과 비용 절약 수단도 달리 없겠죠. 앞서 사례로 언급했던 대한민국 육군 조직 역시, 고질적인 갈등과 반목이 거듭되는 지점에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다면, 적어도 간부들이 ‘사회에 문제를 알리겠다’며 단체로 무장탈영하는 바람에 온 국민의 질타를 전방위로 얻어맞고 권위마저 나락으로 실추하는 사태만큼은 피해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 글은 2021년 11월 2일 개인 링크드인에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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