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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Oct 29. 2021

육사 나온 서울법대생이 소총을 꺼내 들고선

범죄자가 된 엘리트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인 1995년 1월 9일 오후 3시 30분 즈음, 업무 마감을 앞두고 바삐 돌아가던 서울 성동구의 한 은행 출장소에 흰 마스크를 쓰고 바바리코트를 입은 괴한이 불쑥 들어왔습니다. 그는 코트 안에서 꺼낸 K-2 소총으로 청원경찰의 어깨 부근을 후려치고선, 가져온 가방을 한 여직원 쪽으로 집어 던지며 “1000만원을 담으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출장소 안에 있던 직원과 시민들이 순간 빈틈을 노리고 그를 덮쳐 몸싸움을 벌였고, 괴한은 당황해 돈가방까지 팽개치고서 약 700m를 달아났으나 결국 끈질기게 추격해온 청원경찰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법원은 1심에서 범인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습니다만, 항소심에선 범행 자체가 미수에 그친 데다 인명피해도 전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며 징역 4년으로 형량을 감경해 확정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세기말 이전까진 우리나라에서도 이따금 벌어졌던 그저 그런 무장강도 사건 중 하나 정도에 불과하겠습니다만.


문제는 범인이 당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 중 하나로 꼽혔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현역 보병 장교인 하기룡 중위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졸업 성적이 동기 267명 중 15등으로 매우 우수했던 그는 범행을 저지를 당시 국비위탁 과정으로 서울대 법대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며, 육사 재학 시절엔 ‘개교 이래 손에 꼽는 럭비선수’로 불렸을 정도로 문무를 겸비했던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하 중위는 국비위탁을 받기 전 군법무관 시험에 떨어졌던 경력이 있었고, 이 때문에 위탁 교육까지 받고서도 낙방을 거듭하면 야전에서 경험을 쌓은 동기들보다 오히려 뒤처지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렸다 합니다. 그는 결국 술과 경마에 손을 대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급기야는 친구나 선후배에게 돈을 빌려 가며 유흥에 탐닉하다 빚을 4700만원 가량 지게 됐습니다. 참고로 1995년 2월 건설교통부가 정했던 서울 시내 32평 임대아파트 분양가 기준이 1억368만원이었습니다.


1995년 당시 MBC 뉴스에서의 하 중위 사건 보도./MBC 뉴스


당시 국민들은 전도유망한 엘리트 장교가 잡기에 빠져 강도질까지 벌였다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하 중위 체포에 직접 기여해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이들마저 소감으로 “차라리 현역 장교가 아닌 범죄꾼이었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라 말하며 탄식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능력과 인성은 당연히 평가를 나뉘어 받아야 하는 별개 영역입니다.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해서 무조건 재승박덕하다 몰아붙일 수도 없는 것도 마땅하지만, 반대로 실력이 아주 탁월한 인재라 한들 그의 품성이 재주만큼이나 훌륭하리라 보장하기도 어렵다는 이야기죠. 비록 창작물 사례긴 하지만, 능력과 인성이 비례했다면, 쌍문동의 자랑이자 쌍문동이 낳고 기른 천재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 입학자 조상우가 고객 돈을 빼돌려 선물에 손댔다가 목숨 걸고 게임을 뛰는 일이 애초에 벌어지기나 했겠습니까.


기훈이형!!/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中


그리고 CEO는 대체로 그중에서도 인성 부분을 보다 무겁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합니다. 지난 2013년 전경련 국제경영원(IMI)이 CEO 4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무려 92%가 ‘인성 및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답했습니다. 제일 싫어하는 인물 유형으로도 ‘비윤리·비도덕적인 인물’이 38.9%로 가장 많았는데요. 이는 2위를 기록한 응답인 ‘한 입으로 두말하는 책임감 없는 사람(16.8%)’보다도 곱절은 웃도는 수치였습니다. 실력과 잠재력만 잘라 떼놓고 보면 황홀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재일지라도, 도덕심이 부족한 탓에 큰 사고를 칠 리스크를 내포한 ‘하기룡 중위’ 같은 타입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는 것이죠.


사실 일선 채용 실무자들의 선호 또한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2019년 3월 사람인이 기업 인사담당자 487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에도 10명 중 8명(79.9%)에게서 역량이나 스펙이 우수했음에도 태도나 인성이 좋지 않아 탈락시킨 지원자가 있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미 기업 대부분은 채용에 관여하는 임직원이라면 레벨을 막론하고 능력과 성품을 구분해 보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인성 쪽에 가중치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기업이 암만 선한 인재를 갈망한들, 수많은 지원자 사이에서 그들을 정확히 추려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긴 합니다. 사람인이 지난해 7월 기업 431곳에 ‘채용 시 지원자의 소프트 스킬 평가 필요성’을 설문한 결과 87.7%가 필요하다 답했고, 가장 중요한 스킬로는 ‘태도 및 인성(28.6%)’을 꼽았습니다만. 이들 중 73%는 소프트 스킬 평가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답했으며, 가장 평가하기 어려운 소프트 스킬로 지목한 것 역시 ‘태도 및 인성(26.1%)’이었습니다. 심지어 평가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답한 기업 중 84.1%는 소프트 스킬을 잘못 가늠해 채용 실수를 했던 경험이 있다 응답했습니다.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선진국에서 개발된 우수한 검사 기법을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요. 이를테면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MMPI, Minnesota Multiphasic Personality Inventory)나 캘리포니아 성격검사(CPI, California Personality Inventory), 인발트 인성검사(Inwald Personality Inventory) 등을 인재 검증에 활용하자는 논의가 있었죠. 하지만 이를 한국인에게 적용한들 동·서양 간 문화 차이 때문에 바른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와, 재계에서 널리 쓰이는 단계까진 결국 이르지 못했다 합니다.


MMPI의 최신 개정판인 MMPI-2-RF./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그러나 지원자 인성을 적확히 꿰뚫어 보려는 기업의 욕구가 점차 강해지는 데다, 윤리경영을 위해 임직원 개개인의 미시적인 직무윤리까지 중히 다루는 요즘 세태에 미루어 보면, 우리 풍토에 걸맞은 인성 검사 도구도 그리 머지않아 출시되리라는 전망입니다. 이미 사회 전체적으로 심성이 바른 인재에 대한 니즈는 상당하며, 공급은 결국 확실한 수요에 발맞춰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아무리 개발이 쉽지 않은 난제라 할지라도 말이죠.



*이 글은 THE PL:LAB INSIGHT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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