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마음을 바꾸겠어요.

코로나 그리고 최정화

by 묘연

눈을 뜨면 오늘이 며칠인지 생각하듯 자연스럽게 오늘은 확진자가 몇 명인지부터 확인하게 된다. 오늘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보내지 않는다면 아이에게 먹일 메뉴를 생각해야 하고 메뉴가 정해지면 장을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확진자 수를 확인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내 삶의 한 페이지 끼어들어 늘 내 하루의 일과를 좌지우지한다. 그렇게 지낸 지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는 어느 순간 내 삶에 깊이 들어와 있고 그것은 내 삶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전 세계를 아니 이 우주를 바꾸어 놓았다.

어린아이를 키우느라 아이들 없이 외출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기에 늘 친구들에 연락하기를 망설였던 나는

“코로나 잠잠해지면 언제 한 번 보자.”는 말로 근사한 핑계를 대며 자신 있게 다음에 보자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영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건 그 말조차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년이 흐르자 모든 상황에 슬슬 적응되기 시작했다. 결벽증 환자처럼 엘리베이터 버튼을 핸드폰으로 누르거나 가방에 핸드크림 대신 세니타이저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이제 너무 흔한 일이 되었다. 마스크 없는 외출은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나온 것만큼 큰일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집 앞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도 마스크를 잊지 않는다. 초기에는 마스크를 동네 주민들을 잘 알아볼 수 없어 어떤 날은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도 했지만 이제는 눈만 보아도 누군지 짐작이 간다. 오히려 마스크를 끼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을 바꿔버린 코로나, 그놈의 코로나.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실체도 없는 바이러스, 그래서 무서운 코로나.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더 무서운 코로나.

사실 그로 인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크게 변함없이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빠는 직장에 가고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가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숨을 쉬고 살아간다. 아직 모르는 걸려보지 않아서 모르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아서 더 무섭다. 차라리 여러 번 걸려봤던 감기 같은 거라면 이렇게 두려웠을까. 오히려 코로나를 걸렸다 낫게 되면 마치 산고의 고통을 겪고 난 엄마들이나 군대를 다녀온 대학 선배들처럼 코로나를 경험한 사람들은 무용담을 이야기할 만큼 삶이 조금 더 편해질까? 그렇다면 차라리 걸리는 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실체를 두려워하는 이 마음이 너무 괴롭다.

두려움과 답답함과 지루함이 지우개 가루 뭉쳐놓듯 꾸질 꾸질 하게 뭉쳐진다.

꾸질 꾸질 하게 뭉쳐진 감정들은 더 이상 코로나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이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하지만 어떤 마음을 갖든지 간에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코로나는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아마 백신이 개발되고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다른 바이러스로 팬데믹은 앞으로도 올 것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백신 개발의 그날을 기다리며 잘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도 시간은 가고 우리의 인생은 흘러간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원효 대사가 해골물을 마셨을 때 얻은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똑같은 물이지만, 똑같은 상황이지만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해골물이 청량한 물이 될 수도, 썩은 물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의 시간과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행복을 느낄지 불행을 느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니 절묘하게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플라스틱 바구니로 탑을 쌓은 작품. 바로 최정화(b.1961~) 작가의 작품이다.

대구미술관.jpg 출처: 대구 미술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 다이소나 시장에 가면 삼천 원이면 살 것 같은 싸구려 바구니, 집집마다 꼭 있을 것 같은 흔한 바구니, 그래서 조금은 하찮은 그런 바구니. 작가는 그런 바구니들을 모아 거대하고 성스러운 탑이나 기둥을 만든다. 그 작품 속 그 바구니들은 더 이상 싸구려가 아니다. 더 이상한 흔한 물건이 아니고, 더 이상 바구니가 아니다. 어떻게 얼마나 이어 붙이느냐에 따라 그것에는 웅장함과 성스러움 그리고 고귀한 가치가 생긴다.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이야기한다. 감상자는 방금까지 시장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던 바구니를 미술관에서 작가가 제시한 철학과 함께 고귀한 바구니로 인식하게 되고 작가는 이것을 ‘연금술’이라고 표현한다.

201303290522543625.jpg 출처: 대구 미술관

하찮은 것으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그의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의 규모에 한 번 놀라고, 작품의 화려함에 한 번 놀라고, 위트 있는 아이디어에 한 번 놀라고 작품 속에 깃든 작가의 철학에 대해 한 번 놀란다. 그렇게 느껴지는 놀람은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든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받게 된다. 바구니는 변함이 없다. 그저 그것을 표현하는 작가의 마음이 변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마음이 변했을 뿐이다.

20131112.010220740070001i1.jpg 출처: 영남일보
영남일보.jpg 공공미술의 한 장면, 바구니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코로나 시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찾아야 할 열쇠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마음의 변화를 위해 하나의 방점을 찍었고 모든 게 변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 방점을 찍기 위한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상황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만 있어야 할까.

최정화 작가는 요즘 이 코로나 시대에 어려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대구에서 코로나로 한창 힘들었던 시기에는 대구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전시를 하기도 했다. 작품을 이론과 기술로 만들기보다 하찮은 물건이라도 그것에 마음을 담기 위해 노력하는 진심이 있기에 이러한 싸구려 바구니에도 진실한 마음이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PCLCFZIPQ5F3RJTCHAAFKA3QII.jpg 현재 갤러리 p21에서 전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코로나 시대, 생명력의 회복을 염원하는 그의 개인전 ‘살어리 살어리랏다’ 통해 출처:조선일보


나는 솔직히 5년 전 대학원 시절 최정화 작가로부터 내 작품에 엄청난 혹평을 들은 적이 있어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힘든 상황 속에 그의 작품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을 보면 싸구려 바구니에도 진심을 담는 그의 표현은 늘 진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혹평 뒤에 추천해준 책을 사두고는 그가 너무 미워서 한 장도 펴보지 않았는데 오늘은 좀 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시대는 언제 좋아질지 모르겠다. 뉴스에선 코로나는 끝나도 펜데믹의 상황은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린 달라진 상황을 탓하고 불가능해진 일상을 붙잡고 불행하기보다 마음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바뀐 상황 속에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 것이 어떨 때는 너무 미안하고 슬퍼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절대 셋째는 낳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 상황을 부정하고 곧 다시 괜찮아질 거라는 헛된 믿음을 가지는 것보다 이 시간을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마음을 바꿔야겠다.

시간은 어차피 흐르고 아이는 어차피 자라니까 말이다.


괜찮아요. 코로나 전에도 매일 집에만 있었어요.

괜찮아요. 요즘엔 남편도 집에 함께 있어요.

괜찮아요. 올여름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차피 집에만 있어야 했죠.

괜찮아요. 이번 명절엔 시댁에 안 가도 될 것 같거든요.

괜찮아요.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많이 사뒀으니까요.

괜찮아요. 요즘 위생관리를 철저하게 했더니 식구들이 감기도 안 걸리고 좋네요.

괜찮아요. 아이들이 커가는 걸 매일매일 찐하게 볼 수 있어서 지금이 너무 소중해요.

괜찮아요. 그래서 너무 짧게만 느껴졌던 하루가 엄청 길어졌거든요.

괜찮아요. 저만 이런 게 아니라서 괜찮아요.

저 정말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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