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o Rauch(1960~ , Leipezig)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은 뒷꿈치가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집안을 돌아다닌다. 구석구석 퍼져 있는 장난감들, 물건들, 옷가지들은 매일매일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물건들을 분무기에 넣어 뿌린 것처럼 혹은 구석에 자석이라도 달려 모든 잡동사니를 끌어당기는 것은 아닌지 풍부한 상상력을 요구하는 모양새다. 소파 뒤에서 양말 한 짝, tv서랍 아래에서 여러 자루의 색연필이, 냉장고와 벽 사이엔 며칠 전 아들이 찾던 도마뱀 피규어가, 그리고 그 아래에는 뽀얗게 먼지가 묻은 채 만기가 훨씬 지나버린 공과금 영수증들이 고이 잠들어 있다가 눈에 띈다. 먼지에 둘둘쌓여 있는 물건들을 보니 그들을 보면 처음부터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이 든다.
‘난 아무것도 못 본거다.’
다시는 눈에 띄지 못하도록 슬쩍 더 밀어 넣는 짓을 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소파 밑에서 본 그 물건이 필요해 미치겠을 때 나는 결국 빗자루를 들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필요해 미치겠는 그 물건을 구출하기 위해 전장에서 총알을 피해 납작 엎드린 군인처럼 비장하게 총대신 빗자루를 쥐고 바닥에 얼굴을 붙였다. 아이들은 그런 내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따라서 바닥에 얼굴을 붙였다. 시한폭탄을 제거하듯 조심스럽게 먼지와 함께 잠들어있던 물건들을 구출했다. 얼키설키 엉겨있는 먼지 속에서 예상치 못한 물건들이 은밀하게 모여 먼지를 이불삼아 서로를 끌어안고 누워있었다. 꺼내면 꺼낼수록 줄줄이 사탕처럼 많은 물건이 나온다.
검정 머리 고무줄 한주먹, 만화 뽀로로에 나오는 꼬물이처럼 생겨서 아들이 무척 소중하게 여기던 애벌레피규어, 그리고 없어서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던 딸래미의 소중한 쪽쪽이,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던 크레파스와 연필들... 치킨집에서 준 자석쿠폰도, 알 수없이 늘 짝이 맞지 않던 양말도... 골고루 들어 있었다. 필요한 물건 이외의 기상천외한 물건들을 보니 인지하지 못한 나의 사소한 행동들이 떠오른다. 암만 그래도 난 왜 이 물건들이 여기 들어가 있었는지 모른다.
누가 내 머리 끈 한주먹을 그 밑에 던져 넣은 것도 아니고 치킨을 시켜 먹고 쿠폰을 잘 모아둔다며 밀어 넣은 것도 아닐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먼지와 함께 대동단결하여 서로를 단단히 감싸 안고 그 안에서 숨쉬고 살아온 것이다.
난 그것이 어쩌면 우리네 삶과 굉장히 닮아 있다고 느껴졌다.
소파 밑 물건들이 까닭도 없이 미스터리하게 모여있는 것처럼 가끔 연고도 없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미스터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여기 사는지 왜 이런 모양새로 살고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주변 모두는 그저 우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고 우리도 이 상황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 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가끔 굳이 그 이유를 따져 묻는 사람도 있지만. 왜 만났는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점이 좋았는지, 왜 결혼을 결심했는지, 아이는 왜 낳았는지를. 하지만 그 대답속에는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우연과 운명 그리고 놀라움과 경이로움뿐이기에 우린 그저 감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우리만 아는 일들이 벌어지고 우리만 아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먼지에 쌓인 물건들처럼 우리 사이에는 우리만 아는 추억들이 쌓인다.
이러한 과정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떠올랐다. 마치 어떤 이미지나 사물들을 붙이거나 모아서 또다른 내용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콜라쥬처럼 상관없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이념이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작품은 독일의 대표적인 화가 네오 라우흐((Neo Rauch 1960~)의 작품이다. 그는 독일에서 촉망받는 작가로 사회주의적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들을 모아 새롭게 재탄생되는 서사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그의 작품은 구 동독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오는 문화적 박탈감이나 우울감을 표현했다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작품을 늘 개인적인 관점으로 보는 내겐 이 오묘하고 초현실적인 작품이 그저 인간의 인생을 바라보는데 필요한 감성을 제시한 동시대적인 훌륭한 단서로 보였다.
그의 그림에서 근원적 이미지들이 서로 얼키설키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의 삶 역시 부모라는 뿌리 아래 태어나 또 다시 다른 잔 뿌리를 내리고 다른 뿌리를 만나고 그렇게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인간들이 만나 오묘하게 어울려 가정을 이룬다. 우울하고 멜랑콜리한 그의 그림 분위기처럼 어쩌면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일 수도 있고 찰나의 행복을 찾아 평생을 고통받는 비극적인 인생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수많은 선택과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 경험이 다시 뿌리가 되어 정체성을 만들고 녹고 섞여 오묘함을 만들어낸다고 확신한다.
그의 작품은 그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아니면 그저 우리집 소파 밑에 모인 자잘한 물건들의 사연에서 오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확장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거대한 역사적, 사회적 담론속에 현대사회를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아니면 더 확장하여 우주적이고 근원적인 거대 담론을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좋은 작품이라는 의견에는 토를 달 이유가 없다. 소파 밑에서 물건을 찾으면서 그의 그림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좋은 그림 아닌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누군가의 사랑으로 태어났다는 것만 안다. 그리고 그것들의 원래 자리가 어디인지 그래서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를 볼때마다 가끔 생각한다.
‘이렇게 예쁜 아이가 어디에 있다가 나에게 왔을까? 어떻게 나에게 왔을까.’
그 의문 뒤엔 언제나 감사하고 소중한 마음만 있다. 존재의 근원이나 삶의 근원은 분명 있지만 우린 그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필요가없다. 저 작품들의 이미지처럼 어디서 온 이미지이고 어디서 온 소재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며 발생되는 생각과 감정들이 소중할 뿐이다.
오늘 소파 밑을 청소하면서 시작한 이야기가 너무 멀리 온 것 같지만
나는 소파 밑에서 우주를 보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를 만났고 내가 만들어낸 소중한 인연과 삶의 모습들을 보았다.
삶은 그렇다.
결국 이 긴 글 끝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소파 밑에 살고 있던 이 지독한 사연을 꺼내면서 단지 가족들과 함께하는 지금을 한 번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고 더이상 머리고무줄을 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