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men Herrera(1915.5.31~)
나는 지금 세명의 시간을 살고 있다.
나를 위한 시간, 두 아이의 시간 이렇게 말이다.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작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아이의 눈과 손과 발이 되어 하루를 산다. 그렇게 해주어야 할 아이가 내겐 두 명이나 있다.
그러는 동안 잊지 않고 나를 위한 시간도 꼭 마련해 둔다. 마치 누가 시킨 것처럼, 꼭 해야 하는 일처럼 나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해 잠을 줄이고 먹는 시간을 아낀다.
엄마로 살면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고 아이의 보는 엄마의 삶이 어둡고 황량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만들면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고 눈에 띄게 성장하는 아이들의 겉모습만큼이나 나 또한 성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적었다. 깨진 유리컵의 작은 파편처럼 작게 쪼개진 시간을 모아야만 했다. 자는 시간을 줄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특히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티브이 시청을 하는 시간은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아야 했다. 그 시간을 이용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짧은 시간 안에 몰입하고 성과를 내야 함을 의미했다.
아이가 놀다가 예고 없이 잠들면 나도 뜬금없이 책상 앞에 앉아 불시에 끊겨버린 흐름을 다시 잡느라 애를 먹었다. 어떤 날은 작업에 욕심이 생기거나 조금 더 하고 싶은 날엔 눈치 없이 나를 찾는 아이가 조금 밉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로서의 책임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금 나의 주된 역할은 ‘엄마’라며 마음을 다시 잡곤 했다. 사실 그 마음이 괜찮지는 않았다. 조급해졌고 불행해졌고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여기저기서 실수가 튀어나왔다. 어떤 날은 너무 정신이 없어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외출을 하거나 차 문을 활짝 열고 며칠을 지내다 주민의 연락을 받기도 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고 작품이 크게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루지 못할 일에 대한 욕심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나 자신에 대한 애정과 사랑, 그리고 신뢰가 있기 때문이고 결과적으로 아직 괄목할 만한 성과는 없지만 최소한 내 삶을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고 창의적인 삶으로 이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순수하게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행위와 이야기들이 서랍 속에 숨겨둔 사탕처럼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물론 정신없고 피곤한 하루를 대가로 지불해야 하지만 말이다.
엄마가 되어 나 자신의 꿈을 향해 간다는 건 깊은 물속을 달리는 것과 같고,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만큼 느려 터져 답답하지만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도착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꼭 도착하지 않더라도 그 여정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낀다면 그걸로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언젠가 힘겹게 달려온 길에서 누군가 나를 찾아내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이런 의지를 심어주는 작가가 있다. 카르멘 헤레라(1915년 5월 31일~, 쿠바 하바나 출생)는 올해로 105살의 할머니다. 그림에 보이는 직선과는 어울리지 않는 주글주글 주름진 얼굴에 연약하다 못해 위태로워 보이는 할머니지만 는 굳게 다문 입술은 평생 그림을 그리며 몰입하는 순간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고 눈동자는 수많은 직선을 본 예리함과 예민함이 보이는 할머니였다. 그녀는 작품에서 직선과 각을 이용하여 화면을 분할하고 특유의 감각적 색채를 사용해 시각적인 긴장감을 표현하였다. 직선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그녀는 직선이 주는 단호함과 예리함 위에서 무뎌지지 않는 감정을 느끼며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을 살며 수많은 작품을 했다. 그녀의 작품은 세련되고 강렬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고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 탓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motherhood를 이야기하는 작가로 이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이 작가는 평생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대신 매일매일 작품에 매진했고 89세가 되어 작품을 팔고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녀에게 작품이란 자식 이상으로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매일 보고 매일 생각하고 매일 사랑하는 내 자식처럼 그녀에게 캔버스에 표현되는 아찔한 직선으로 분할된 삭면은 그녀가 매일 보고 매일 생각하고 매일 사랑했던 것들이었다.
Herrera has remarked that it is the “beauty of the straight line” that keeps her going.
그렇게 그녀는 평생 수많은 직선 위에서 울고 웃으며 사랑을 담고 인생을 담았다. 우리네 엄마들이 아이들을 키우며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 속에 울고 웃으며 진한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녀는 예리한 직선 위에서 수많은 감정의 춤을 추며 무뎌지지 않는 감정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묵묵히 기다렸고 꾸준히 나아갔다. 직선의 아름다움이 주는 마음의 위안을 받으며 잡다한 것들을 걷어내고 그 위에서 아슬아슬 순수한 사랑을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며 매일매일 새로운 기억과 추억을 심는 것처럼 그녀는 캔버스 위에 직선의 다양한 모습을 새롭게 찾아 나서며 언젠가는 이 공든 탑을 누군가가 찾아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젊을 때, 내가 화가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현재 사람들은 내가 화가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만약 버스를 기다린다면 버스는 올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 그 말이 맞습니다. 나는 거의 한 세기 동안 버스가 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왔습니다!”
When I was younger, nobody knew I was a painter. Now they’re beginning to know I’m a painter. I waited a long time. There is a saying. If you wait for the bus, the bus will come. I say, yeah. I wait almost a century for the bus to come. And it came!
-2017년 1월 8일 Art Daily 기사 원문
하루에도 열두 번 더 직선을 그리고 예쁜 색을 채우면서 날카로운 감각을 갈고 또 갈아내면서 행복하게 살았던 카르멘 헤레라의 인생이 담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육아하느라 자신을 잃어버린 채 늘 좁은 집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체력을 소진하는 내게 아이를 대할 때 가져야 할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음과 동시에 지금의 이 상황과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게 날카로운 각의 직선을 보고 있으면 오늘을 치열하게 살겠노라 다짐하게 된다.
우리가 몇 살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인생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고작 20년... 그 안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가장 젊은 오늘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모든 시간이 그렇겠지만 특히 엄마의 시간은 아이들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엄청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볼 뿐이다.
그림 출처: Lisson Gallery,Whitney 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