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보는 엄마
"엄마. “
요 근래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단어는 아직 알아듣기에는 어려울 만큼 정확하지 않지만 ‘엄마’라는 단어만큼은 아주 정확하고 깔끔하게 발음한다.
아직은 작고 여리고 깨끗한 입으로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불러주는 일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엄마라서 가질 수 있는 이 행복하고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하나 더 추가한다.
앙증맞은 입술로 나를 부를 때마다 어쩌면 어미새가 알려준 대로 모이를 먹는 어린 새처럼 17개월 동안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쏟았던 말들을 하나씩 돌려받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일 다음으로 많이 한 단어는 ‘엄마’였으니까.
“엄마가 해줄게.”
“엄마한테 와.”
“엄마랑 하자.”
“엄마가 하지 말랬지,”
“엄마가 우리 아기 사랑하지...”
17개월 동안 내가 나를 엄마가 아닌 꽃이라 불렀다면 아이도 나를 엄마 말고 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이가 소리 내는 '엄마'라는 단어를 새기고 또 새겨보면서 난 아이에게 어떤 엄마였는지 돌아보게 된다.
'난 아이에게 어떤 엄마인 걸까.'
문득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워서 꽃 같다고 이야기했던 이의연 작가의 그림이 떠오른다.
그가 그린 꽃들은 서로 너무도 다른 존재들이 모여 있지만 어느 하나 초라하지 않고 어느 하나 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고 어울려 어느 하나 떼낼 수 없이 함께한다.
마치 우리처럼.
그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마저 꽃들과 어울려 사람인지 꽃인지 모를... 어울림.
그의 그림들을 아이와 함께 보고 있노라니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한 번, 한 번 부를 때마다 가슴에서 한 송이 한 송이 피어올라 그의 작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아이 마음속에서의 내 존재가 작품에 피어있는 하나의 꽃이기를 바라지는 건 뭘까.
괜히 욕심이 생긴다.
오리는 태어나 처음 본 동물을 엄마라고 여긴다. 어릴 적 전학을 갔을 때 낯선 환경에서 누군가가 내게 가르쳐주고 알려주면 그게 그렇게 소중하고 고마워서 오리 새끼처럼 그 친구를 졸졸 따라다녔던 적이 있었다.
아이도 이 세상에 처음 전학 와서 세상을 제일 많이 가르쳐주고 함께하는 사람인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내가 수없이 했던 말들을 어쩌면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조금은 모자라도 조금은 부족해도 완벽한 인성을 갖지 않아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가 말 한대로 그렇게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간다.
내가 세상이 꽃 같다고 노래하면 아이도 아마 세상을 꽃으로 보겠지.
그러고 보면 세상을 꽃같이 바라보는 이의연 작가의 부모님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햇살이 온 집 안을 휘감은 어느 나른한 오후.
별 것 아닌 일상에 소중한지도 잘 모르겠는 그때.
서로 마주 보지 않아도 무슨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을 때.
하도 많이 불러서 이젠 부르는 일이 귀찮아질 즈음.
서로 말로 대답하지 않아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더 이상 엄마가 너에게 절실한 존재가 아닐 그때가 되면.
엄마를 이유 없이 그냥 한번 불러다오.
그럼 엄마는 꽃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