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희_조춘도(早春圖)
설거지를 한참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너를 보니
문득 내가 뭘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그깟 설거지가 뭐라고 너를 뒤에 세웠는지...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실 나는 당황스러워. 왜 우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너는 너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겠지?
엄마에게 자기를 봐달라고 여러 번의 시그널을 보냈지만 모른 척하고 있는 엄마에게 화가 났을 거야. 그렇지?
뒤돌아 서서 설거지에 몰입하고 있는 동안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마 너는 말하지 못할 테지...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재하는 순간의 것을 소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너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 역시 아무리 자세한 설명을 듣다고 해도 모를 거야.
이유 없이 우는 너를 보고 답답해하는 엄마의 표정이 '드러난 상황'이라면
우리 서로 등 돌리고 모르고 있던 그 시간에 일어난 일들이 '감춰진 사실'이 되겠지?
우린 그 감춰진 사실을 서로 이야기하고 듣고 이해해야만 하는 거야.
서로 답답해하는 표정을 탓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어.
이런 이야기를 하니 떠오르는 그림이 있네.
엄마는 이 그림을 학교에서 처음 보고 두 번의 충격을 받았었다.
처음엔 그림 공부 좀 했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 유명한 그림을 처음 본다는 사실에 처음 충격을 받았고, 처음 본 이 그림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수업 시간을 멍하게 보낸 나 자신에게 놀라서 두 번 충격을 받았단다.
그만큼 엄청 유명한 그림이야. 그래서 일찍이 너에게 이 그림을 알려주고 싶기도 해.
이 작품은 중국 북송시대 곽희[郭熙]가 그린 조춘도(早春圖)야. 제목의 뜻은 이른 봄의 풍경이라는 뜻이지.
아직 완연한 봄이 아니기에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들이 게 발톱처럼 생겼어. 이러한 나무들의 모습이 안개와 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모습이 이 그림의 큰 매력이 아닐까 해.
연기처럼 흩어지는 나뭇가지들과 적절한 여백...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의미와 내용들...
마치 시를 읽을 때 행간을 두고 음미하는 것처럼 이 안개는 시의 행간처럼 많은 여운을 가지고 있어. 그 뒤에 숨겨진 내용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끝도 없이 펼쳐지지. 곽희는 이 여백에서 아직 오지 않은 이른 봄의 의미와 여운을 담고 싶었는지 몰라. 하지만 엄마는 저 멀리 안갯속에 숨겨져 있는 공간을 재미있게 상상했어. 키가 엄마만큼 자란 너와 함께 등산을 하는 모습이라든지, 네가 좋아하는 새들이 잔뜩 날아가는 모습을 우리 함께 바라보는 일이라든지 그런 거. 높은 산을 올라가다가 숨이 차서 잠시 멈춰 간식을 먹고 있는 우리의 행복한 모습들. 이런 것들이 상상되었지. 여백으로 비워져 표현된 안갯속엔 우리의 행복이 숨 쉬고 있었어.
다양한 시각의 산의 모습은 우리가 함께 산속을 누비며 웃고 떠드는 동안 눈과 마음에 담아지는 감정과 섞인 산의 풍경들을 이야기하는 듯했어. 실제로 이 그림에서 보이는 다양한 각도의 산세들은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내려다봤다 올려다봤다 깊이 봤다 하면서 그림 앞에 머무를 시간을 주지.
그림처럼 그렇게 서로 이해하기 위해 나누는 이야기들은 이렇게 저렇게 사실에 마음을 더해 독특한 모양과 색의 그림처럼 펼쳐지겠지. 그러는 동안 우린 분명 웃게 될 거야. 웃음 속에 따듯한 눈빛은 웃음 사이의 여백을 온기로 바꾸게 될 거야. 웃기는 일이야. 그려진 부분보다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말이야.
지금은 하루 종일 너와 붙어있어. 너는 아직 혼자 무언가를 하기에 많이 어려서 엄마가 다 해주어야 하지. 하지만 앞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우리 사이엔 '비어있는 시간'이 늘어날 거야. 우리 서로 함께할 수 없는 '비어 있는 시간'을 이야기하고 이해하는 것. 그러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어.
여백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여백은 그런 거야. 보이지 않지만 진짜를 보여주기도 하지.
그리지 않은 것을 통해 더 많은 것을 그리기도 해.
우린 각자의 여백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 지도 몰라.
검은 먹색에서 서로의 독특한 색감을 찾아보고 비어있는 공간에서의 온기를 찾아보는 것이 우리 함께 마음 나누며 사는 모습과 닮아서 유난히 동양화를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어. 보면 볼수록 그림 앞에서 무한한 이야기를 읽게 되는 신기한 이 그림은 사랑하는 마음과 닮아서 더 애착이 가네.
엄만 너에게 이런 그림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구나.
언제든 서로의 여백을 공유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세상에 그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너를 사랑하는 사람일 거야.
이 그림처럼 이른 봄날의 반짝이는 산과 같은 너를 사랑하기 위해 엄마는 늘 마음에 여백을 품을게.